[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국 중국 일본 문화를 이어주는 ‘남해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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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1-12-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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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개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으로 갔던 여행일정이 비교적 만족도가 높았다. 먼저 이동거리가 짧다. 오가는데 시간이 적게 들고 기내고통(?)이 없다는 실용적인 이유가 첫번째다. 그리고 한자문화권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삶을 살아온지라 이로 인한 문화적 동질감이 주는 정서적 친밀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차별성을 가지는 또다른 다양함이 여행의 묘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거리는 가까워도 역병의 창궐로 인하여 마음대로 오고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삼국간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하여 서로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면서 감정의 골까지 함께 패였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가깝고도 먼 이웃이 되었다.
 
현재 비행기를 타고서 해외(海外) 여행기분을 낼 수 있는 곳은 오직 탐라국 제주도 뿐이다. 이마저 불가능했다면 코로나19의 국민적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사찰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마중나온 도반이 ‘어디 가고 싶냐?’고 묻길래 ‘서복(徐福)유적지’라고 대답했다. 바다로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한 정방폭포 곁에 서복기념관이 있다. 서귀포는 제주공항에서 섬을 횡단해서 가야하는 먼 곳이다. 거기 들렀다가 다시 사찰로 들어가려면 거의 제주도를 반쯤 일주해야 하는 노선이기도 하다. 육지에서 온 사람에겐 먼거리가 아니지만 지역주민에겐 부담스런 거리라는 농담이 오고 갔다. 하긴 거리감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다. 몇 년 전에 중국측 불교인사들을 인천공항에서 경주 불국사로 안내했다는 가이드 말이 생각났다. 관광버스를 오래 타야한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그 정도는 ‘시내버스 타는 시간에 불과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면서 함께 크게 웃었다고 한다.
 
2003년 가을 개관한 서복기념관은 중국관광객은 물론 일본관광객에게도 인기있는 곳이였다. 왜냐하면 서복은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에 모두 행적을 남긴 있는 특이한 인물인 까닭이다. 중국의 여러 자매도시에서 보냈다는 각종 관련 기념물과 내로라 하는 현대중국 정치인들이 방문하면서 남겨놓은 방명록 이름자와 함께 표지석 글씨까지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입구의 대문은 아예 중국풍이다. 이렇게 서로 잘 지냈던 시절도 있었나 하고 반문할 만큼 아득한(?) 옛날얘기가 된 탓에 그런 광경들 마저 이제 생경하다. 어쨋거나 인기 여행지 제주섬도 이런저런 이유로 중국관광객 일본관광객도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되었다.

 

[서복공원(원자바오 글씨)]

 
서복은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라는 진시황(秦始皇 BC259~210)의 명령을 받고서 배를 탔다. 그 내용의 전말은 사마천(司馬遷 BC145~86)의〈사기. 진시황 본기〉〈사기. 회남형산열전〉에 남아있다. 제주도를 거쳐 일본 큐슈 사가(佐賀)현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현재 이 지역에는 무덤과 서복공원이 있고 그를 신으로 모신 긴류신사(金立神社)가 22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중국 산동성 용구(龍口)에도 서복사당이 있으며 관음성지로 유명한 절강성 닝보(寧波) 인근의 자계(慈溪)에도 서복문화원(文化園)이 있다. 명실공히 세 나라의 문화를 이어주는 ‘남해시대’를 열어준 공덕으로 오늘까지 삼국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진다.

 

[서복 석상(중국 산동성 용구시 기증)]

 
당시 삼국을 이어준 매개체는 불로초(不老草)였다. 평균수명이 쉰살도 되지않던 시대에 불로장생은 모든 이의 바램이었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가 불로초를 구해오기도 전에 50세로 수명을 다했다. 그 시절에는 불로장생을 위한 갖가지 신선술이 발달했고 서복 역시 그 계통에 종사하는 방사(方士)였다. 조선의 왕들도 마찬가지다. 창덕궁 후원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불로문(不老門)이 있다. 왕은 그 아래로 드나들면서 ‘불로’를 꿈꾸었을 것이다. 서울 종로 북촌입구의 픙문여고 자리에 새로 건립된 공예박물관에도 야외 공예품으로 ‘짝퉁 불로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로(不老)는 감사하지만 장생(長生)은 사양한다’를 외치는 인근 사무실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그 문을 놀이삼아 들락거린다. 불로와 장생을 동격으로 묶었던 사자성어는 옛사람의 몫이고 현대인은 아예 ‘불로’와 ‘장생’을 나누어 두 단어로 쪼개 버렸다. 오래 살기만 하는 장생은 축복이 아니라 또다른 불행이 되어버린 ‘고령화 사회’의 달갑지 않는 부작용 때문이라 하겠다. 또 의술의 발달로 인하여 진시황이 원하고 서복이 그렇게 찾았던 불로초 마저 시큰둥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불로문(북촌 공예박물관)]


이제 삼국인이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불로초는 과연 무엇일까? 공동행복을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그 마음이 아닐까? 서복은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가 각각 떨어진 별개의 역사가 아니라 한중일 관계교섭사로 접근해야 함을 일찍이 알려 주었다. 가까운 나라끼리 각각 서술하는 역사책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삼국 관계사’ 속에서 접근해야만 ‘공존’이라는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중국의 정치가 조박초(趙樸初 1907~2000)거사는 한국 중국 일본 불교의 교류를 위하여 ‘한중일 불교협회’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삼국의 황금유대운동을 폈고 그 정신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떤 모임이건 국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갖가지 분야의 문화교류가 다양화하고 자발적으로 지속된다면 유사시에 민간사절로서 완충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쨋거나 인간관계도 그렇고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가 만들어진 이후 수많은 국가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수 천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왕들이 태어나고 또 죽었다. 작금의 이런 상황도 길게 본다면 별 것도 아닌 또다른 일상이다. 어쨋거나 이 또한 언젠가 지나가리라.
 
《벽암록》18칙 ‘무봉탑’에서 남양혜충(南陽慧忠 ?~775)국사는 당나라 숙종(肅宗711~762)황제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제가 도리천 하늘에서 제석천왕 곁에 있으면서 땅 아래를 내려다보니 좁쌀을 뿌린 듯이 천자(天子 왕)가 많은데 그 흥망이 마치 번갯불이 번득이는 것 같았습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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