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냉장고 벽의 묵은 얼음을 청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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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1-10-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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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마른 수건을 찾았다. 냉장고 바닥은 방바닥과 틈이 있어 손가락이 들어가는지라 제대로 닦았지만 이불장 바닥은 수건 한 장 겨우 들어갈 틈밖에 없다. 얌전하게 펴서 살살 밀어넣고는 대충 닦았다. 시간이 지나면 마르겠지. 얼마 후 다시 물이 흥건하다. 같은 동작을 반복한 후 ‘이게 무슨 일인가’하고 다시 살폈다. 엊저녁에 냉동식품을 꺼낸 뒤 제대로 문을 닫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냉동실 입구 언저리 부분은 녹아서 물이 흘러내렸지만 안쪽은 성에와 안개가 평소보다 더 두껍게 끼어 있는 게 아닌가? 밤새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외부 열기를 식히면서 자체의 냉기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 더욱 열심히 땀흘리며 팬을 돌린 결과물이었다. 냉동고의 실내면적이 성에와 얼음 때문에 엄청나게 좁아졌다. 냉동식품 사이사이에도 방금 만들어진 듯한 하얀 안개서리가 첩첩이 끼었다. 만지니 손에 얼음알갱이가 묻어날 정도였다.

가을맞이 대청소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아래쪽 냉장실 문을 열었다. 거기에도 이미 뒤쪽에는 성에가 얼어붙은 채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이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된 것이다. 작년이었던가? 잘 떨어졌던 윗단 부분만 한번 제거한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때도 아랫단은 그대로 두었다. 이미 빙벽이 되었는지라 제거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맘먹고 단단히 준비했다. ‘강(强)’에 맞추어진 손잡이를 ‘성에제거’에 고정시켰더니 이내 조용해지면서 냉장고 실내등이 꺼진다. 아래 위 두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 있는 물건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의 대형냉장고로 옮겼다. 이제 열어두고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완전한 액체가 되기 전에 반고체 상태에서 제거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 일거리가 줄어들고 시간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냉동실에 낀 얼음에 냉동선 파이프 무늬가 비치기 시작한다. 금세 벽쪽은 약간 질척해진 느낌이 든다. 얇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길고 좁은 공구를 찾았다. 부침개를 뒤집듯이 틈 사이로 집어넣었다. 살살 앞뒤로 넣고 빼기를 반복하니 이내 툭 하고 측면 얼음이 떨어진다.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수월하게 양면의 얼음을 떼낸 뒤 위쪽도 같은 방법으로 떨어냈다. 바닥얼음까지 제거한 후 남은 물기는 깨끗한 수건으로 닦았다. 덕분에 냉동실 전체가 말끔해졌다.

냉동실은 생각한 것보다 문제가 간단했다. 하지만 냉장실은 그게 아니다. 뒷면의 얼음은 두께도 두께지만 흰 얼음이 오래되어 일부는 이미 투명한 얼음으로 바뀌어져 있다. 눈이 쌓여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영원히 녹지 않는 만년설로 바뀐다고 했던가. 살펴보니 거의 만년설 단계에 진입한 것 같다. 층층이 질러 놓은 칸막이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칸막이를 두 손으로 힘껏 당겼다. 하지만 뒤쪽은 이미 얼음과 일체화되었는지 꿈쩍도 않는다. 더 완력을 가하면 파손될 것 같아 중단했다. 녹아 흐르는 빙하를 닦아내며 좀 더 기다렸다. 얼마 후 다시 위칸막이를 당겼다. ‘찍~찍~’ 하면서 얼음 벌어지는 소리와 함께 얼음과 칸막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야호!!!! 얼음 뒤쪽 틈으로 얇은 금속판 공구를 들이댔다. ‘툭’ 하면서 윗부분의 얼음을 떨어져 나온다. 손바닥 두 개를 겹친 크기다. 두께는 두손을 포갠 것보다 더 두껍다. 무슨 노다지라도 캔 양 두 손으로 움켜지고 기쁜 얼굴로 세면장으로 옮겼다.
 

 

또 기다려야 한다. 아랫부분은 아무리 봐도 금방 녹을 것 같지 않다.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림 한 편에 많은 사람이 화론을 쓴 책인데 제목은 <사유의 경련>이다. 부제는 ‘이 그림 하나의 화론’이라고 작은 글씨를 위쪽에 써 두었다. 그림의 주인이며 이 책의 편집자인 김호석 화백을 포함한 총 16명(1인이 글 두편을 쓴 것은 두 사람으로 취급했다.)의 글을 받아 함께 실었다. 얼마 전에 삼청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들렀다가 구입한 것이다. 저자 사인까지 받았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가 유명한 것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많은 사람의 작품평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 문인 16명의 글에다 한국 근대에 활약했던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의 감상평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이다. 본작품은 가로 70㎝에 불과한데 청나라 문인 글은 4m, 한국인 글은 8m 길이로 도합 15m에 이르는 대작이 되었다. 그림과 글씨가 둘이 아닌 경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제대로 된 집단창작(?)의 문인화가 된 것이다. 중국까지 가서 16명의 글을 받은 추사의 제자 이상적(李尙迪·1803~1865)도 요즘 같았으면 아마 두루마리가 아니라 책으로 엮었을지도 모르겠다. 세한도 16인에 맞추었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사유의 경련>에도 16편의 화론이 실려 있다.
 

 

책 한 권 읽는 사이에 방바닥까지 물이 흘러나왔다. 일단 닦고 난 뒤 아래 칸막이를 당겼다. 이미 얼음이 녹은 탓인지 쉽게 빠진다. 그렇다. 모든 것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채소칸 서랍까지 뺐다. 다시 얼음 뒤로 얇은 금속판 공구를 밀어넣었다. 몇 년 묵은 것 같은 얼음덩어리가 ‘텅’ 하고 앞으로 쓰러진다. 가로 30㎝, 세로 60㎝ 두께는 가장 두꺼운 곳이 10㎝는 될 것 같다. 차갑고 무겁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들고서 세면장으로 옮겼다. 희유한 일인지라 사진기록까지 남겼다. 뒷날 혹여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을까봐 이해를 돕기 위한 구조물 곁에서 다시 한 장 찍었다. 찰칵!
 

 

이만큼 얼 때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터인데, 녹는 것은 잠깐이다. 얼음은 세면장에서 몇 시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숙소로 사용되는 이 방으로 들어온 지 3년 만에 냉장고 청소를 제대로 한 것이다. 요즘 신형 냉장고는 성에와 얼음이 끼지 않는다고 했다. 비록 10년 이상 된 구형이지만 청소하고 말리면서 냉장고 안을 제대로 살피는 기회도 가졌다. 그동안 문만 열고 닫으면서 내가 필요한 것만 사용하는 이기심뿐이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냉장고를 위한(사실은 사용자를 위한) 일을 한 것이다. 괜히 혼자 뿌듯해 한다. 냉장고는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가을맞이 대청소 기념으로 자작 디카시(디지털카메라 영상+시) 두 줄까지 남겼다.

냉장고 안쪽 오래오래 숨었는데
술래에게 들켜 질질 끌려 나왔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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