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승군들의 성 쌓는 속도가 백성들에 비해 3배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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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1-09-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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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남한산성 최고명소는 수어장대(守禦將臺)다. 1751년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영조의 명에 따라 2층으로 증축했다. 본래는 서장대(西將臺)라고 했다. 인근 매바위(鷹巖)에는 ‘수어서대(守御西臺)’라는 각자(刻字)가 남아있다. ‘서장대’가 ‘수어장대’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른쪽 아래 마당에는 ‘무망루(無忘樓)’가 있다. 1989년 수어장대 2층에 있던 현판을 이 자리로 옮겼다. 인조의 삼전도 치욕과 효종의 북벌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영조가 썼다고 한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북벌계획일지라도 잊지는 말자’던 무망루 곁에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정치인이 심었다는 기념식수가 있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그 허세는 북문인 ‘전승문(全勝門)’ 이름과 맞닿는다. 병자호란 때 군사 300명이 대기하다가 청군의 기습을 받고 전멸한 곳이다. ‘이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이기자’라는 의미로 붙였다고 한다. 쩝! 하긴 정치를 하려면 대내용 발언도 필요한 법이라고 해두자.
 

[수어장대 무망루 - 원철스님 제공]

발길을 붙들어 매는 것은 청량당(淸凉堂)이다. 주봉인 청량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청량당 근처에는 당주가 머무는 집이 있었다. 안방 건넛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 단출한 세칸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그때의 향나무와 전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육이오 때 소실된 것을 이후 청량당만 복원했다. 영험있는 산신기도처로 알려져 지역주민과 토착종교인들에게 인기있는 유명굿당이기도 하다.
 

[청량당 - 원철스님 제공]

전쟁을 대비하면서 남한산성을 쌓는 국가적 큰일을 할 때는 알게 모르게 억울한 희생자도 나오기 마련이다. 당사자인 이회(李晦)는 총융사(摠戎使군사 총책임자) 이서(李曙1580~1637)의 부하였다고 한다. 동남쪽 방향의 성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고 건설현장에 투입되었으나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공사비를 모두 지출하고도 부족한지라 사재를 털었고 그것도 모자라는지라 부인 송씨와 유씨가 삼남(三南·충청 호남 영남)지방으로 화주(化主·모금)를 떠났다. 결국 공금횡령이란 죄목을 둘러쓰고 이 자리에서 극형에 처해졌다. 모금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인들도 그 소식을 듣고서 송파나루 근처 쌀섬여울(米石灘) 강물에 몸을 던졌다. 뒷날 재조사를 하게 되었고 험한 지형과 꼼꼼한 기초공사 때문에 공기(工期)를 채우지 못한 것이 알려지면서 누명도 벗게 되었다. 두 부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한강변에 재각(齋閣)을 세웠고 이회도 수어장대 자리에 사당을 세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강변 재각은 없어지고 청량각에 합사(合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줄거리다.

실제로 남한산성을 완성한 사람은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대사가 지휘한 의승군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3년 만에 완공했다. 그 공로로 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에게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현종10년(1669) 6월 20일(신사)에는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주부윤(廣州府尹) 심지명(沈之溟)이 임금께 아뢰었다. 병자년(1636년 인조14년)에 (남한산성 쌓을 때) 승군의 힘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지난해(1668) 북문과 서문을 건립할 때 일반백성(民丁)이 3일 동안 한 일이 승군이 하루 한 일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승군들은 부역할 때 죽을 힘을 다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부역 때문에 마지못해 끌려나온 일반백성들보다 승군들의 울력(일) 속도가 3배나 빨랐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회사건’ 이후에 모든 일을 승군이 떠맡게 되었을 것이다. 성을 완성한 후 남은 공사대금을 국고에 반납까지 했다. 1846년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편집한 『하남지(河南志)』권9 성사(城史)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회 이름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남한산성 수축을 청하였다.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명하였다. 이서는 고승인 각성(覺性)과 응성(應性) 등을 불러 지역을 나누어 일을 맡겼다.”

본래 산성 안에는 사찰이 두 개 밖에 없었다. 추가로 7개를 새로 건립했다. 동문 근처의 개원사(開元寺)는 본영사찰이었고 나머지 8개사찰은 팔도에서 차출된 승병들이 출신지별 숙식처로 이용했다. 나라의 어려움 앞에서 조선팔도에서 달려와서 하나가 된 모범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270년 동안 수도 한양을 지키는 호국사찰 역할을 겸했다.

남한산성 안에는 많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에는 이회(李晦), 숭열전에는 이서(李曙)를 모셨다. 이서는 남한산성뿐만 아니라 각처의 산성을 수리했고 뒷날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와중에 과로로 인하여 남한산성에서 순직하였다. 청계당(聽溪堂)에는 벽암대사를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세 사람 모두 남한산성 관련 공로자들이다. 현재 청계당은 없어지고 영정은 청량당으로 옮겨졌다. 일부에서는 청계당과 청량당이 처음부터 같은 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정면에 이회를 봉안하고 좌우로 벽암대사와 이회의 두 부인을 모신 걸로 미루어보건대 같은 집이라고 보기에는 억측이 지나친 것 같다. 구전기록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니 그러려니 하고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무신도(巫神圖)에 가까운 청량당 현재 영정이 아니라 제대로 된 벽암대사의 진영에 호은유기(好隱有璣1707~1785)는 이렇게 찬(讚)을 붙였다.

호랑이를 그리되 포효하는 모습까지 미칠 수 있는가? 터럭뿐이로다.
사람을 그리되 그 속마음까지 드러낼 수 있겠는가? 얼굴뿐이로다.
벽암존자의 영정에서 그 명성과 덕행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의대(衣帶 왕이 내린 가사)뿐이로다.
나의 찬사(讚辭)가 하늘과 땅을 감화시킨 그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있는가? 붓의 행로가 막힐 뿐이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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