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28] 세종의 최대 역점사업: 한글 창제보다 고려사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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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1-05-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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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재위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선진강국

  • 세종은 『고려사』 편찬하면서 ‘대왕’이 됐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세종대왕 재위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선진강국
 
세종대왕(이도李祹, 생몰 1397~1450년, 재위 1418년~1450년) 재위 32년간은 한민족 최고의 감격시대였다. 세종 시대 우리나라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선진강국이었다.

당시 중국 명 나라는 황제가 오이라트족의 포로가 되는(1449년 토목의 변) 치욕시대였다. 일본 열도는 무로마치 막부시대 말기로 천황과 쇼군의 권위가 다 같이 떨어진 역대 최악의 하극상 난장판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은 아직도 어두컴컴한 중세 암흑시대였다.
 
훈민정음 반포,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세종1년 1419년 태상왕 태종이 주도), 집현전 설립, 속육전 법전 편찬,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등 발명(장영실), 음악 장려(박연의 새로운 악기 개발), 총통, 신기전,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 개발과 개량, 농사직설(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 편찬)등등,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세종실록』 1418년 처음부터 1450년 끝까지 제일 오래 많이 기록된 세종대왕 업적은 무엇일까? 훈민정음일까? 아니다.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25년)~1447년(세종29년) 총 5차례(1)* 기록된 반면, 『고려사』는 즉위한 해 1418년(세종1년)~1450년(세종32년) 승하하던 해까지 무려 34회(2)*나 기록돼 있다.
 
태종 이방원은 1418년 9월 9일 셋째 아들 세종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422년 6월 11일까지 4년간 태상왕 자리에 앉아 줄곧 국정을 감독하고, 병권과 인사권, 의금부를 통한 감찰권을 장악하였다. 세종에게는 그 밖의 업무와 고려사 편찬등을 맡겼다.
 
◆세종은 『고려사』 편찬하면서 ‘대왕’이 됐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다. 최고의 독서는 저술이다. 475년간 고려의 무궁무진한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모으고 편찬하고 교열 감수하는 과정 중에 세종은 한민족사상 최고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당대 모든 분야, 즉 문학, 사학, 철학, 법학, 언어학, 음악, 수학, 과학, 공학, 철학, 경제학, 재무학, 회계학, 천문학, 물리학은 물론 영토확장과 신무기 개발 등 전천후 전방위 백과전서파 학자이자 실천적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32년 재위기간 내내 고려사 총편집장 역할을 맡아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함께 연구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은 윤관의 9성 개척에서, 훈민정음 창제는 고려문자를 수집 연구한 과정 중에 나온 것이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고려사』를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했다. 1419년 9월에 류관과 변계량이 개수했다.

그러나 세종은 다시 1423년 류관과 윤회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의 개서에 대하여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하도록 명하여 전면개수했다.

그 후 1438년~1442년 신개와 권제가 4번째로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친히 교정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음을 발견했다. 역사를 왜곡한 권제를 처벌하고 반포를 중지했다.

1446년 세종은 다시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에게 개찬을 명했다. 실제 작업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석형, 김예몽, 하위지, 양성, 유성원, 이효장, 이문형 등 당대의 최고 문관들이 참여하였다. 1449년(세종 31년)에는 춘추관에 전지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했다. 세종이 승하한 1451년(문종 1년)에 최종적으로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세종에게 전면개찬 5회, 부분개찬 6회의 퇴짜를 받아 아마 세종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편찬 기간도 더 길어졌으리라. 그토록 『고려사』는 세종대왕이 평생의 비원을 담은 라이프북이자 대백과사전이자 한민족사상 최고의 정사(正史)였다.
 
전면 개편 지시 기록 5회, 부분교정 지시 기록6회, 세자인 문종과 함께 편집회의 경연에 나아가 친히 감수한 기록만 4회, 총 ‘고려사’ 관련 『세종실록』 34회의 기록 중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기사 3건만 들면 다음과 같다.
 
(1)왕씨들은 '용의 자손'으로 기재하라
 
흔히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씨들을 몰살했다는데 야사로 알고 있다. 아니다. 정사였다.

조선을 세운 지 2년도 안된 1394년 1월부터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등으로 유배를 보내는 식으로 왕씨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394년(태조3년) 4월에는 강화도와 거제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왕씨들을 주멸하는 일대학살이 벌여졌다.
 
1394년 4월 14일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1394년 4월 15일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이다
1394년 4월 20일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주멸했다.
1394년 4월 26일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왕씨에 대한 탄압은 태종때도 계속되었다.
 
우왕의 비였던 왕흥의 딸을 아내로 삼은 통례문 판사 유은지가 귀양가다
1403년 11월 15일 (태종 3년)
전조 왕씨의 후손 왕휴의 아들 왕거을오미를 순금사에 가두다 1413년 (태종 10년) 11월 15일
전조 왕씨의 자손인 왕상우를 신문하여 관련자를 보고하라고 명하다
1416년(태종 16년) 11월 1일
 
그러나 세종대왕은 왕씨들을 포용하고 용의 자손이라 등재하라 하였다.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검토관 이선제(李先齊)에게 이르기를,
"네가 지금 관직이 춘추관을 겸임하여 『고려사』를 편수하는 데 참예하고 있으나, 왕씨를 용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그 말이 매우 괴상한 것이다. 예전에 충선왕이 원나라에 갔을 적에 원나라 학사가 그 연유를 물었으니, 비록 그 말이 황당하지만 후세에 불가불 전하여야 하겠으니, 사책(史冊)에 갖추 기재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였다. 1439년(세종 21년) 1월 12일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개국할 초기에 왕씨(王氏)를 참혹하게 대우한 일은 진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우리 황고(皇考 세종)께서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추도하여 마지않으시고 항상, ‘왕씨(王氏)의 후손을 찾아내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다. - 1451년 문종 1년 11월 6일
 
문종 때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2)윤관이 개척한 9성과 공험진을 현지조사 보고하라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제일 오래 많이 찬양돼 온 장군은 동북만주(흑룡강성) 9성 개척한 윤관(총235회 세종대왕이 최다언급11회)이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 우리는 을지문덕 강한찬(강감찬), 최영, 이순신 등 수비형 장군만 부각하고 있을까?
 
세종대왕은 고려사 편찬에 집중하다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보다 더 넓었다! 광활한 고려의 북방영토와 윤관 대장군을 되살리고 싶었다.
 
1439년(세종21년) 8월 6일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지시하다.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 북록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였다.
 
세종대왕의 공험진 조사 명령에 대한 김종서의 현장 답사 보고서등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 편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3. 「고려사』를 왜곡 편찬한 죄로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공신을 파직
 
1449년 (세종 31년) 2월 22일
『고려사』 개찬할 때 뜻대로 삭감한 권제·안지·남수문 등에 과죄하다.
이조에 전지하기를,
"전자에 『고려사(高麗史)』가 소략함에 지나쳐서 권제(權踶) 등에게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더니, 이제 그 글을 보건대, 권제가 뜻대로 삭감하여서, 혹은 남의 청탁을 듣고, 혹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긴요한 절목(節目)은 모두 그 사실을 빠뜨렸다. 안지(安止)도 권제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도와 이루었으니, 참람함이 막심하매, 권제의 고신(告身 임명장)과 시호를 추탈(追奪 박탈)하고, 또한 안지의 고신을 빼앗아 영영 서용(敍用임용)하지 말며, 낭청(郞廳 종6품 오늘날 5급공무원 사무관) 남수문(南秀文)도 『고려사』의 일을 오로지 맡아서 당상관에 아부하였으니, 그 죄가 또한 같으니, 고신을 추탈하라.“
권제가 구사(舊史)를 깎고 보탠 것은 매우 자세하였다. 그러나, 채하중(蔡河中; 고려 말 역적 공민왕때 참수형)의 어머니는 용강의 관비이라, 사관이 모두 그 사실을 썼고, 윤회(尹淮3)도 기록하였으며, 권제도 초고에는 실었으나, 최사강(崔士康)의 청을 듣고 마침내 깎았으며, 또 권제의 아버지 권근이 성지를 사사로 개탁한 일을, 제가 그 말을 왜곡되게 쓰고, 또 사초에는 권부(權溥)·권준(權準)·권고(權皐) 등의 행실을 낮추어 썼는데, 제는 이것을 또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중략)
권제의 죄가 오로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나,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그 화(禍)가 미치는 것이 마땅하다. 안지는 성품이 나약하여 권제에게 견제(牽制)되어 같이 죄를 받았다. ’남수문은 널리 경사(經史)에 통하고 글에 고기(古氣)가 있었다. 처음에 사마천(司馬遷)을 모방하여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중론(衆論)의 억제하는 바가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권제의 편찬한 『고려사』에 남수문의 글이 많았으나, 성품이 좁고 꼿꼿하여 역사 편찬하는 일을 독단으로 함이 많으니, 동류들이 마음으로 꺼리고, 안지도 남수문의 독선을 미워하여 일찍이 좌중에서 꾸짖고 욕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문종때 사관은 권제를 이렇게 평하였다.
권제는 총명하고 학문이 넓으며, 말을 잘하고 시사를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기첩(妓妾)에게 혹하여 처자를 대접하기를 매우 박하게 하여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하니, 세상에서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의 딸은 일찍이 첩과 더불어 거스림이 있어, 제가 발로 차서 죽었는데, 뒤에 역사 왜곡 때문에 제명(除名)하였다. 그 자손들은 세세대대로 벼슬하지 못하였다.
 
권제는 조선시대의 문신. 친명정책을 펼쳐 조선시대 왕권확립에 공신 권근(權瑾)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14) 문과에 장원하고, 1429년(세종11)에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6년(세종18)에 이조판서로서 『동국역대가』를 지어 올리고, 1446년(세종27)에 의정부 우찬성(종1품 부총리급)으로서 훈민정음을 활용하여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이런 공신중의 공신인 권제도 『고려사』를 자의적으로 삭감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세종대왕은 고려사를 아주 꼼꼼하게 친히 재검증한 것이다.
 
특히 요즘 곡필 100%가 상습성 체질화된 언관학 지식인들이 세종대왕 시대에는 어떻게 처단됐을까.
 
이런 세종대왕이고 이런 『고려사』인데 1392~1451(꼬박 60년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임금 5대와 당대 최고지성들이 피와 눈물을 다 쏟아 편찬해낸 [고려사]를 국보도 아닌 보물로 처박아 놓고 있다.

◆◇◆◇◆◇◆◇각주

(1)*1훈민정음을 창제하다1443-12-30 (세종 25년)
2《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1446-09-29 (세종 28년)
3이과와 이전의 취재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였다 1446-12-26 (세종 28년)
4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다 1447-04-20 (세종 29년)
5《동국정운》 완성에 따른 신숙주의 서문 1447-09-29 (세종 29년)

(2)* 
1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해야 함을 말하다 1419-09-19 (세종 1년)
2유관·변계량 등에게 《고려사》의 개수를 명하다 1419-09-20 (세종 1년)
3유관에게 《고려사》 교정에 대하여 묻다 1420-02-23 (세종 2년)
4경연에서 정사를 보다 1420-05-28 (세종 2년)
5유관·변계량이 《고려사》를 교정하여 올리다 1421-01-30 (세종 3년)
6상왕이 환관을 보내어 권규에게 제사를 지내다 1421-04-05 (세종 3년)
7공신의 작을 물려받는 고례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다 1422-12-21 (세종 4년)
8예조 정랑 윤수가 고려 태조 이하 팔위 제향에 쓸 전물 등에 대해 아뢰다1423-06-29 (세종 5년)
9지관사 유관·동지 관사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케 하다 1423-12-29 (세종 5년)
10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1424-08-11 (세종 6년)
11사관이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으로부터 즉시 사초를 수납하지 말게 하다1424-12-01 (세종 6년)
12《고려사》를 정도전이 편수한 전례에 따라, 참의한 이름을 고치고 휘하게 하다1425-12-07 (세종 7년)
13정묘년에 고친 의관 제도를 《원전》 속의 전조 판지에 추가 기록케 하다1426-11-20 (세종 8년)
14변계량이 문과의 초장에 강경하는 것의 불가함을 상서하니 제술을 위주로 하게 하다1428-04-23 (세종 10년)
15 효제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다1428-10-03 (세종 10년)
16중국 황제가 구하는 석등잔의 헌납 방법과 학문진흥책을 의논하다 1429-01-04 (세종 11년)
17전조의 길재·최영 등에 대해 얘기하다 1430-11-23 (세종 12년)
18임금이 《고려사》를 보고 춘추관에 수찬 방법에 관한 처리여부를 전지하다1432-08-10 (세종 14년)
19경연에 나아가 《고려사》의 체재에 대해 논의하다1438-03-21 (세종 20년)
20춘추관에서 신우·폐왕 우·폐왕 창으로 할 것을 아뢰다1438-07-08 (세종 20년)
21경연에 나가 고려사 편수에 왕씨를 용의 자손이라 하는 말을 갖추어 기재하도록 이르다 1439-01-12 (세종 21년)
22.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1439-08-06 (세종 21년)
23.우의정 신개가 함길·평안 양도의 부방, 입보 등의 폐단과 비변책에 대해 상언하다 1440-02-18 (세종 22년)
24.의정부에서 송골매를 잡는 데 대한 상벌의 규정과 법을 만들어 올리다1442-04-10 (세종 24년)
25.신개·권제 등이 찬술한 《고려사》를 올리다 1442-08-12 (세종 24년)
26.의정부 우찬성 권제의 졸기1445-04-16 (세종 27년)
27.의정부 좌의정 신개의 졸기1446-01-05 (세종 28년)
28.이계전과 어효첨에게 《고려사》의 유루된 것을 교정하게 하였다1446-10-11 (세종 28년)
29.《고려사》에서 요나라가 세자에게 면복을 준 일이 빠졌으므로, 교정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춘추관에 전지하다 1449-01-04 (세종 31년)
30.《고려사》 개찬에 대해 춘추관에 전지하다 1449-01-28 (세종 31년)
31.김종서·남지·윤형·김효성·안지·이변·조수량·김문기·김연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449-02-01 (세종 31년)
32.춘추관에서 《고려사》 개찬에 대해 논의하다 1449-02-05 (세종 31년)
33.《고려사》 개찬할 때 뜻대로 삭감한 권제·안지·남수문 등에 과죄하다 1449-02-22 (세종 31년)
34.《고려사》 편수시 우·창 부자의 기술 문제를 춘추관에서 아뢰니 그대로 따르다 1449-04-06 (세종 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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