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시대 정치개혁 대제언] <2> 우리는 늘 맞고 너희는 틀렸다? 나, ‘편 가르기’ 정치로 대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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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1-03-29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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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 코로나, ‘편 가르기’ 정치로 대처 못한다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정치의 주된 목적과 기능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있다. 헌법정신에 동의해서 그 나라의 국민으로 살기로 한 이상, 그걸 구현하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일 수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해선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하지만 크게 보면 하나여야 한다. 소위 통합이다. 정치는 통합을 이루고 지키는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둬야 한다. 우리 정치가 과연 그러한가.

국회 국민통합위원회(공동위원장 임채정·김형오)가 지난 14일 내놓은 조사 결과는 우려할 만하다. 국회도서관 DB 등록 전문가 1801명을 상대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대한 전망을 물었더니 응답자의 80.9%가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분열의 원인으로는 ‘정치’가 63.1%로 ‘경제적 원인’ 30.9%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정치가 국민 통합은커녕 분열의 주범으로 꼽힌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론적으로 보면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비효율 탓이 크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생전에 “한국의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경쟁력은 2류”라고 했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소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남은 것은 날것 그대로의 분열과 대결뿐이다. 때로는 정치가 이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내 편, 네 편으로 나뉘고 사회는 갈라진다. 문재인 정권 4년 동안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정책은 ‘배 아픔’이 아닌 ‘배고픔’에 초점을

이 정권 들어 한국정치는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빠진 사람들의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모두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안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나 판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견해(선입관)를 지지하고 뒤받쳐주면 다 내편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편, 곧 적(敵)이다. 인지능력의 결함인 확증편향으로 편 가르기가 심해졌는지, 아니면 편 가르기 때문에 확증편향이 심해졌는지는 연구과제이겠지만 양자가 교호작용을 통해 우리 정치를 더 깊은 분열과 비효율의 늪으로 몰아간 것은 분명하다.

그 생생한 현장을 우리는 조국사태와 검찰개혁 논란 등 숱한 내로남불의 위선 사례를 통해 질리도록 목격했다. 부동산정책도 마찬가지다. 25차례나 대책을 내놓았음에도 잡히지 않던 집값은 정부가 지난달 80만호 주택 공급대책을 내놓자 비로소 주춤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공급 위주의 정책을 폈더라면 어땠을까. 흔히 국가의 정책은 국민의 ‘배 아픔’이 아닌 ‘배고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들 한다. 서울의 특정지역에 대한 정서적 편견과, 부동산을 세금으로 때려잡겠다는 아집에서 일찍 벗어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확증편향과 편 가르기의 종착역은 진영(陣營‧block)이다. 무릇 진영이라 함은 자신의 진영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안전’을 보장해주고, 대신 진영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체제나 메커니즘을 말한다. 요즘 같은 국민국가(nation state) 시대엔 안전과 충성을 맞바꿔주는 것은 국가가 유일하고, 또 유일해야 한다. 그런데 그 국가 안에 진영이 생기고, 국민이 진영에 충성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익명과 댓글로 무장한 군중이 진영의 보호를 믿고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가 부정될 수도 있다. 진영화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진영에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진영의 승패다. 따라서 상대는 타도의 대상이다. 친(親)조국 쪽에서 보면 반대세력은 적폐·친일파·토착왜구이고, 반(反)조국 쪽에서 보면 저들은 종북주의자·주사파·사이비 사회주의자다. 때로는 양측이 서로 실체도 없는 허상(虛像)을 만들어놓고 싸우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다. 서로에게 상대는 만들어진 적(敵)이다.

진영은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강화된 확증편향은 편 가르기를 심화시킨다. ‘확증편향→편 가르기→진영화→확증편향→편 가르기→진영화···’로 이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누가? 1차적인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문 대통령은 과연 그 책무를 다 했는가. 진정성 있는 소통과 대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아쉽게도 문 대통령은 그 고리를 끊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야당으로부터 “편 가르기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친일파가 아니라는 공인인증서라도?

실제로 '편 가르기'는 이 정권의 주된 무기처럼 보였다.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적폐청산'을 들고 나왔을 때 이미 편 가르기는 예고됐었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섬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대통령의 모든 인사, 의전, 언행에서 국민이 느낀 건 편 가르기를 통해 우리 편의 결속을 강화하라는 독려 메시지 같았다. 41.1%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이 다수 국민을 청산의 대상으로 몰고, 그 지지 세력은 한 술 더 떠 ‘토착왜구’로 낙인까지 찍었으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이 정권의 패착 중의 하나가 국민을 친일(親日)과 반일(反日)로 나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정권 입장에선 대단히 좋은 카드였을 것이다. 왜? 친일‧반일은 우선 쉽고 명쾌하며 감성적이다. 경제나 대북정책처럼 복잡하지가 않다. 친일은 악(惡), 반일은 선(善)이다. 전자는 ‘친일=보수=기득권=악’이고, 후자는 ‘반일=진보=사회적 약자=선’이다. 이처럼 단순한 등식을 통해 정권이 나서기도 전에 국민 스스로가 “내 조상 중에 혹여 친일파는 없었는지···” 지레 걱정하도록 만들었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편 가르기가 없다.

대체 언제까지 국민을 친일-반일 프레임에 묶어둘 셈인지 모르겠다. 악질 친일파들은 이미 세상을 떴는데, 연좌제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그 후손들을 단죄하겠다는 건가. 일부 인사들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면 친일파의 묘(墓)는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복회장은 “적폐청산의 핵심은 바로 친일청산”(광복회 홈페이지)이라고 공언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 집안에는 친일파가 없었다”는 걸 증명하는 공인인증서라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녀야 할 판이다.

편 가르기는 이 정권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국정 철학, 포용(包容)과도 배치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끌어안고 가겠다는 게 포용이다. 혹여 이 정권은 포용을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이나 복지 확충 정도로 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포용은 정치적·이념적으로도 확장되어야 옳다. 앞으로는 포용을 외치면서 뒤로는 반목과 대립을 방조·조장하는 데 몰두한다면 진정한 포용이 아니다. 그게 위선이다.



‘오만의 파벌화’는 민주주의를 파괴

어떻게 하면 편 가르기의 유혹과 진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미국의 철학자이자 인식론의 대가인 마이클 린치(코네티컷대학)의 ‘파벌적 오만’이 참고가 될 법하다. 그는 2019년 저서 (한국어 제목 :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성원 옮김, 2019년 메디치)에서 오만을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증거와 경험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고집하는 태도”로 봤다. 이런 태도가 “한 집단에서 공유되고, 그 내용 면에서 사회적인 성격을 띨 때, 즉 ‘우리’의 일부로서 경험되고 ‘그들’(반대자들)을 겨냥할 때 파벌적 오만”이 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오만의 파벌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결과는 치명적이라고 했다. 인간성의 말살과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이 정권의 속칭 ‘문빠’를 ‘파벌적 오만’의 전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린치는 ‘지적 겸손함(intellectual humility)'을 회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새로운 증거를 통해 향상될 여지가 있다고 보라”는 것이다. 교과서 같은 말이긴 하나 이런 마음가짐과 실천이 국가의 진영화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자신도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소통이 되고, 상대의 비전과 정책도 수용할 수 있다. 원래 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그런 게 아니었던가.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국민과 소통함으로써 모두의 대통령이 될 거라는 희망 말이다.

이제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포스트 코로나 경주’를 위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치’가 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정치, 각자의 진영 속에 똬리를 튼 채 반목하고 증오하는 정치, 린치의 말을 빌리면 무엇을 ‘사실’로 여길지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 정치로는 완주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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