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 90분짜리 '리얼리티 쇼' 펼친 美中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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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재호 특파원
입력 2021-03-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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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든 취임 뒤 첫 대화, 거칠었던 상견례

  • "국제질서 위협", "고질병 고쳐라" 난타전

  • 내부결속, 동맹강화 위한 보여주기식 공방

  • 대화 지속, 무역·기술·안보 후속 협상 예고

  • 체제·이념 전쟁 양상, 접점 찾기 어려울 듯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 대화에 참석한 양제츠 중국 외교 담당 정치국원(왼쪽 사진 오른쪽)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 사진 왼쪽) 등 양측 인사들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뒤 미·중 간 첫 고위급 회담이 열렸지만 상견례치고는 매우 거친 언사가 오갔다.

미국은 중국이 국제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몰아세웠고, 중국은 미국을 향해 타국 내정에 간섭하는 고질병 좀 고치라고 받아쳤다.

외교적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난타전은 마치 시청률에 목을 매는 리얼리티 쇼를 연상케 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양국이 내부 결속을 꾀하고 자국 내 강경파를 달래기 위해 온갖 자극적인 방식으로 공세를 펼쳤다고 분석한다.

이번 회담은 향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 싸움 혹은 상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의 성격이 짙다.

경제·무역·첨단기술·지역 안보 등 분야에서 실무적 접근이 이뤄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양국은 향후 고위급 대화를 지속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다만 미·중 갈등이 체제와 이데올로기, 진영 대결의 양상을 드러낸 이상 기후변화 공동 대응 등의 변수로 간극을 메우기는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美 "할 말 다 했다" VS 中 "역사적 회담"

미·중 대표단은 지난 18~19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세 차례에 걸쳐 10시간가량 회담을 진행했다.

미국에서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중국에서는 양제츠(楊潔篪)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과 왕이(王毅)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전면에 나선 '2+2' 대화 방식이었다.

이번 회담의 백미는 첫 만남 때 언론에 공개된 모두발언 내용이다. 당초 5분 내외로 예정됐던 모두발언은 양측의 설전이 이어지면서 90분 가까이 이어졌다.

먼저 발언한 블링컨 장관은 중국이 규칙에 기초한 국제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미국은 신장위구르 지역을 포함해 중국의 행동에 대한 깊은 우려를 논의할 것"이라며 "홍콩과 대만, 미국에 대한 사이버 공격, 동맹을 향한 경제적 강압 등도 의제로 오를 것"이라고 압박했다.

민감한 주제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오자 중국 측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양제츠 위원은 블링컨 장관이 언급한 내용들이 모두 중국 내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은 개입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또 "미국은 높이 앉아 내려다보듯 말할 자격이 없고, 중국인에게 이런 수법은 먹히지 않는다"고 맞섰다.

왕이 부장도 "미국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는 패권적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며 "이런 고질병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양측의 발언 수위가 전례 없이 높았지만, 특히 중국이 거칠게 반격에 나선 게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 어차피 기대가 낮았던 회담이었던 만큼 양측 다 자국 내 관중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집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케일린 버치 애널리스트는 CNN에 "실질적 대화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이렇게 빨리 담판이 결렬된 것은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미·중 양국 모두 상당 부분은 자국 관중들이 듣기 원하는 발언을 했다"고 덧붙였다.

CNN은 "블링컨 장관은 미국 의회 내 많은 대중 강경파 의원들이 이 회담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며 "양보 없이 강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한술 더 떴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미국은 중국이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권과 핵심 이익을 수호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라며 역사에 남을 회담이라고 표현했다.

일부 중국 언론은 1901년 청나라가 의화단 운동 이후 미국 등 연합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베이징 의정서'까지 거론하며 "중국은 이번 회담에서 100년 전의 모습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성공과 피폐해진 경제 회복을 위해 범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이번 중국 때리기는 미국 내부 결집의 지렛대를 마련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반중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도 올해 7월 공산당 창당 100주년과 내년 10월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등 굵직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체제 결속을 다져야 할 시기다.

장기 집권을 꿈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입장에서는 미국에 밀리는 모습이 연출되는 걸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다.

한 베이징 소식통은 "코로나19 사태에서 빠르게 벗어나 주요국 중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달성한 중국의 자신감은 상당하다"며 "양 위원과 왕 부장도 이 같은 분위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화 지속한다지만··· 합의점 찾기 난망

회담 초반의 공방을 뒤로하고 비공개로 진행된 대화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광범위한 논의가 오간 것으로 보인다.

설리번 보좌관은 회담 직후 취재진과 만나 "힘들고 단도직입적인 협상을 했다"며 "워싱턴으로 돌아가 생각을 정리한 뒤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찬찬히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양 위원은 "대내외 정책과 양자 관계에 대해 솔직하고 건설적인 교류를 했다"며 "유익한 대화였고 상호 이해 증진에도 도움이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기후변화 공동 대응과 인적 교류 정상화를 비롯해 경제·군사·방역·사이버 안보 등에 대해 소통했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를 포함해 이란·아프가니스탄·미얀마 문제도 회담 테이블에 올랐다고 소개했다.

외교부는 "양측 모두 이 같은 고위급 전략 대화를 지속하기를 바라고 있다"며 향후 추가 회담이 진행될 것임을 암시했다.

다만 무역 갈등과 첨단기술 경쟁, 아시아·태평양 안보 이슈 등에서 합의점을 찾는 과정은 지루한 노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회담에서는 합의점 도출이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 장면이 다수 목격됐다.

양 위원은 "중국과 국제사회가 준수하는 질서는 유엔이 중심이 되고 국제법에 기반한 것"이라며 "미국과 서방 세계는 국제 여론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식 민주주의가 있다"며 미국식 체제를 강요하지 말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중화권 매체 둬웨이는 "미·중 갈등은 근본적으로 낡은 질서와 새로운 질서 간의 경쟁"이라고 평가했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미국 등 서방에 맞서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도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누구의 팔이 더 굵고 주먹이 더 큰지는 상관 없다"며 "크다고 작은 것을 깔보거나 자기 힘을 믿고 약자를 능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세계 최대의 선진국인 미국과 최대의 개발도상국인 중국은 협력해야 한다"며 "정치 제도가 다른 두 대국은 공존할 길을 찾을 책임과 능력, 지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양국 간 경쟁을 체제와 이념, 진영 대결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도 반중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정상회의를 열고, 한·일과 유럽연합(EU)을 중국에 맞설 네트워크에 합류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등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앵커리지 회담이 한창이던 19일(현지시간) "최대 임무 중 하나가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혔고, 같은 날 캐슬린 힉스 국방부 부장관도 공개 연설에서 "중국은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 번영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저격했다.

위안펑(袁鵬)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원장은 관영 중국신문망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상 강대국 간의 흥망성쇠와 달리 미·중 갈등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더 복잡하고 전면적"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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