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인더스토리] SK하이닉스 성공 신화, 이제부터 진짜 시험대

한때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국내 반도체 기업이 인공지능(AI) 혁명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떠올랐다. 10여 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의 '만년 2위'에 머물던 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굳히며 글로벌 반도체 지형을 바꾸고 있다.

지금부터가 하이닉스의 진짜 시험대라고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AI 투자 열풍을 등에 업고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메모리 산업 특유의 공급 과잉과 가격 급락의 사이클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이후 빅테크 기업들의 AI 투자 재원 조달이 어려워질 경우 후년부터 SK하이닉스의 매출이 반토막 나는 등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고 일부 증권사들은 지적한다. 중국 신흥 메모리 업체의 증산이 겹치면 초과 공급 위험이 커질 우려도 제기된다.

국내외 정치적 투자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미국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이달 초 마이크론의 뉴욕주 공장 착공식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향해 "미국으로 데려와 공장을 짓게 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국내 서남권에 생산시설을 확충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진SK하이닉스 제공
[사진=SK하이닉스 제공]

2000년대 초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극심한 침체를 맞았다. 당시 하이닉스반도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회사는 이 충격으로 사실상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매출은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고, 시가총액은 5억 달러(약 7380억원) 수준까지 추락했다. 이후 약 10년에 걸쳐 하이닉스의 혹독한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가 하이닉스를 사실상 분해 인수하려는 시도를 벌였지만 가까스로 회피했다.

2012년 경영난에 빠진 하이닉스를 SK그룹이 인수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지난 6월 일시적으로 삼성전자를 제치고 국내 시가총액 1위에 오르는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오랜 경쟁자인 삼성전자와 사실상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섰다. AI 시대의 핵심 제품인 HBM 분야에서는 삼성을 앞서고 있다.

AI 붐은 하이닉스의 기업가치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지난 5월 시가총액은 1조 달러(약 1475조원)를 돌파했다. 7월 10일에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해 265억 달러(약 39조원)를 조달했다. 외국 기업으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상장 다음 날 주가가 다소 하락했다. 반도체 기업들의 지나치게 높은 밸류에이션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매도 때문이었다. 다만 지난해 초와 비교하면 주가가 10배(1000%) 상승한 상태다. 이번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과 지난 3월까지 1년 동안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은 대규모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될 예정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달 "향후 5년 동안 전체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만큼 시장 수요는 폭발적이다. 최근 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배 증가했다.

AI 열풍 자체를 하이닉스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 열풍을 기회로 바꾼 회사라는 점에서 하이닉스의 부활은 매우 놀랍다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최첨단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이다. 이 때문에 기존 강자들이 대부분 계속 우위를 유지한다. 후발주자가 선두를 추월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이닉스의 역전 비결은 무엇인가. 이코노미스트는 민첩성으로 설명한다. 2010년대 초반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의 약 40%를 차지했다. 하이닉스 점유율은 약 25%에 그쳤다. 삼성의 그늘에 가려 있던 2위 업체는 경쟁사를 뛰어넘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이닉스는 반도체를 더 작게 만드는 기존 방식만으로 성능 향상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칩을 더욱 미세화하는 대신 물리적 한계를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2013~2018년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박성욱 전 사장의 회고다.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을 전환점으로 꼽았다. 인텔에 밀려 2위였던 미국 반도체 기업 AMD가 하이닉스에 그래픽처리장치(GPU)용 적층형 메모리 개발을 제안했던 것이다. 양사는 이전 세대 그래픽 메모리 제품을 함께 개발해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다.

2013년 첫 HBM 제품은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여러 층 쌓으면 기존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라이벌들의 실책은 추가 도약의 계기가 됐다. 2019년 삼성전자는 다른 종류의 칩에 투자하기 위해 HBM 팀을 축소했다. 이 기술의 미래를 믿었던 엔지니어들이 하이닉스로 이탈했다. 제품 지연으로 고전하던 인텔 출신 엔지니어들도 하이닉스에 합류했다.

기업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가 냉혹한 능력주의를 통해 내부 경쟁을 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면, 하이닉스는 협업을 포용한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엔지니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연구하고, 실패한 프로젝트는 '사례 연구'로 자산화한다. 적층된 칩들 사이의 틈을 몰딩 액체로 채워 열을 분산시키는 '대량 리플로우 몰디드 언더필(MR-MUF)' 등 혁신 기술의 탄생 배경이다. 

하이닉스는 2022년 4세대 HBM3를 삼성보다 먼저 시장에 선보이며 AI 칩 제왕인 엔비디아의 첨단 메모리 단독 공급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하이닉스는 시장 선도 기업으로 초호황기를 이끌어 본 경험이 없다. 경쟁사 추격도 거세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서버 플랫폼 '베라 루빈'에 탑재될 HBM을 일부 공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범용 D램 등 기존 메모리 시장에서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다.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마이크론 등은 모두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40년까지 총 2조 달러(약 2958조원) 이상을 투자해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할 방침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폭발적인 수요와 치열한 경쟁이 과잉 투자의 위험을 높인다고 우려했다. 경기 변동성이 매우 큰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호황기마다 반복돼 온 현상이다.

지난 메모리 호황의 정점이었던 2018년 하이닉스는 매출의 40%를 설비투자에 투입했지만 이듬해 서버 시장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메모리 가격이 절반 수준으로 폭락했다. 하이닉스 매출도 33% 감소했다. 반도체 산업 특유의 막대한 고정비 때문에 영업이익은 87% 급감했다.

하이닉스는 설비투자를 매출의 3분의 1 이내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실패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실제 지난 1년간 매출 대비 설비투자 비중은 평균 22% 정도다. 과거보다 훨씬 엄격한 조건으로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향후 수년간의 판매량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게 하이닉스 측 설명이다.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지난 1년 동안 거의 10배 가까이 상승한 메모리 가격이 내년에 정점을 찍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2028년에는 하이닉스 매출이 45% 감소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중국 메모리 업체인 CXMT와 YMTC 등이 성장하면서 공급 과잉이 심화할 수도 있다.  

하이닉스는 2600억 달러(약 384조원) 이상을 투자해 호남 등에 새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우수 인력과 협력업체가 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생산시설을 분산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큰 성공에 감당해야 할 책임과 압력도 함께 커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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