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을 통해 본 한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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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종 인턴기자
입력 2020-09-23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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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북됐다 돌아온지 15년 만에 간첩으로 몰렸던 김흥수 할아버지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1977년 가을. 어느 날처럼 조업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김흥수 할아버지는 갑자기 수사기관에 끌려간다.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조업 활동을 하던 중 북한에 납북됐다 돌아왔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구속영장 없이 체포된 그는 29일간 구금된 상태로 조사를 받는다. 조사가 끝난 뒤 그는 국가기밀을 누설했으며, 탈출을 감행한 간첩이 돼버렸다.

간첩이 돼버린 그는 1978년 4월 8일 구속 1년 만에 자백이 증거로 인정해 유죄가 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2심에선 법원 직권으로 양형만 조정됐을 뿐 징역 15년에 자격정지15년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2011년 그는 33년 만에 누명을 풀고자 재심을 청구한다. 법원은 재심개시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를 막은 건 검찰이었다. 검찰은 재심개시결정은 위법하다며 항고를 했고, 다시 기각되자 재항고를 한다. 그러나 2014년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황병하 부장판사)는 이 역시 기각하고 결국 재심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10일 그는 3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누명에서 벗어난다.
 
증거능력 없는 진술, 모두 '이근안의 작업'
법원이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결정적 이유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간첩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결문은 당시 수사관들이 그를 불법으로 체포·구금한 상태에서 물고문을 자행했다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재심 법정에서 "경찰에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했던 것이다"며 "상처 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두 번씩이나 고춧가루와 물을 먹여 고문했고, 사실대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닌 미리 각본에 의해 진술서를 써 외워 연습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름이 이근안이다. 이근안은 당시 수사를 했으며 1978년 법정에선 "고문해서 자백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심법원은 피고인 일관된 진술 등을 근거로 수사 당시 고문에 의한 자백임을 인정했다. 검찰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판결문에 따르면 "검찰 피의자신문 단계에서도 피고인이 경찰에서의 폭행, 협박 등에 의해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된 채로 조사받으며 수사관들에 의해 조사를 받을 때와 거의 동일한 취지로 진술했을 것이라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법원은 인정했다.
 
재심 법정에서 드러나는 진실...36년 만 무죄 판결
재심 재판에서는 그가 납북될 당시 북한 해역 쪽으로 가게 된 경위가 밝혀진다. 과거 그와 함께 조업활동을 한 선원은 증인으로 출석해 "피고인으로부터 ‘어로저지선 북방으로 넘어가서 고기를 잡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가 선장 김영모에게 월선 조업을 권유했다는 공소사실이 뒤집어진 것이다.

함께 조업활동을 한 다른 선원은 그처럼 고문을 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다른 선원은 재심 법정에서 "어디로 가서 고기를 잡느냐는 선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운을 뗀 뒤 "저도 당시 조사를 받았는데 몇 대 맞았고,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때리고 하니까 폭행에 못 이겨 (허위진술)한 것 같은데, 질문을 하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예’라고 답변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피고인에 대한 검찰 피의자신문조서는 그 증거능력이 없고, 피고인이 법정에서 이 부분 범행을 모두 부인하고 있으므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그에게 3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 전경[사진=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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