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용' 중국과 '코끼리' 인도 ..위기의 프레너미(적이자 동지)

이수완 논설위원입력 : 2020-06-28 14:13
정면충돌? 모디의 '힌두 민족주의' 열차 vs 시 주석의 '중국몽' 열차

시진핑 사진 불태우는 인도 반중 시위대 (뉴델리 로이터=연합뉴스) 인도의 반중 시위대가 22일(현지시간) 뉴델리 거리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의 사진과 중국산 제품을 불태우고 있다


[이수완의 월드비전] 인도와 중국의 해묵은 국경 분쟁이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지난 15일 인도 북부 카슈미르 동쪽에 위치한 라다크(Ladak)지역 갈완 계곡(Galwan Valley)에서 발생한 양측 군인들의 '몽둥이 난투극'은 단순한 우발적 사고로 넘어갈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다. 수십명의 사망자를 낸 이번 사태는 60년 넘게 지속된 국경 분쟁, 그리고 미국과 견줄 정도로 경제적 군사적 몸집을 키운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ㆍ뉴실크로드)를 앞세우며 인도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 양국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결과이다. 앞으로 양국 관계가 프레너미(적이자 동지)로서 남을지, 아니면 '용'(중국)과 '코끼리'(인도)가 맞붙는 단순한 적대관계로 변화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국경갈등의 씨앗은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 시절 이미 뿌려졌다. 영국이 주변국들과 협상해 제멋대로 그어놓은 경계선들이 뒤죽박죽 얽힌데다, 지형이 워낙 험준하고 혹독한 히말라야 기후로 인해 어디가 국경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세계 1, 2위 인구대국이자 핵보유국인 두 나라가 맞대고 있는 대부분 지역은 실질통제선(實際控制線·LAC)이 애매한 국경으로 존재한다. 총길이가 무려 3488㎞인 통제선에서 중국령 악사이친(Aksai chin)과 인도령 라다크(Ladak) 사이 구간은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돼온 지역으로, 최근 양측은 군요새화를 경쟁적으로 강화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1962년엔 이곳 해발 수천미터의 고원지대에서 한달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인도는 3000명이 전사하고 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중인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 그리고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은 인도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에 나서게 만들었다. 인도는 10년 후인 1974년 핵실험에 성공한다.

양국은 수십년의 갈등과 협상 끝에 접경지역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위해 1996년 교전규칙에 합의했다. 서로 실질통제선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국경지대 2㎞ 이내에서 군병력이 총기나 폭발물을 휴대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번 난투극에 총 대신 돌과 쇠막대기 등의 ‘원초적인 무기’가 쓰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총기 사용을 금지하는 교전규칙을 개정 바꾸기로 했다. 두 나라가 확전을 피하기 위한 완충장치마저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는 것이다. 인도 측에서 사망자 20명 등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런 유혈사태는 1975년 이후 45년 만에 처음이다. 최근 양측이 국경지역에 병력과 장비를 속속 증강하면서 국지전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중국군이 이번 난투극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못이 박힌 쇠몽둥이 사진까지 공개되면서 인도에서 중국제품 보이콧 켐페인 등 반중 감정이 들끓고 있다는 소식이다. 스마트기기 내에서 중국산 앱을 골라서 삭제해주는 애플리케이션까지 등장할 정도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인도정부는 관세인상과 무역협정 재검토 등 중국산 수입 제한 조치를 검토 중이다.
 
이러한 대결 상황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호주 일본 등과 함께 인도태평양 전략을 펼치며 인도를 자기 편으로 세우려는 미국에겐 좋은 기회이다. 인도가 오랜 전통의 비동맹노선 견지 입장을 뒤로하고, 중국의 위협에 맞서 미국과 안보 협력을 급속하게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주요 7개국 (G7)체제를 G11로 확대하면서 4개국을 초대했는데, 여기엔 한국과 인도가 포함되어 있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G7 확대 구상에 "창의적이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접근"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호주 일본 등과 함께 군사훈련에도 적극 동참하는 등 인도는 미·중간 신냉전 구도에서 점점 대(對)중국 포위망의 일환이 되고 있는 모습이다. 인도가 양자택일로 미국을 택하면 동남아와 인도양 주요 항구를 '진주목걸이'처럼 꿰는 시진핑 주석의 '해상실크로드' 전략에도 차질은 불가피하다. 미국의 외교매체 포린폴리시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면서 인도 바로 코앞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감을 느낀 인도가 미국과의 관계를 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도 이런 인도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인도에서는 1950년대만 해도 "힌디 치니 바이바이(Hindi Chini Bhai Bhai)"라는 말이 유행했다. `인도와 중국은 형제'라는 뜻이다. 1954년 인도의 국부이자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과 만나 양국의 '평화공존 5원칙'을 담은 판츠실 조약(Panchsheel agreement)을 맺을 당시 유행했던 말이다. 영토와 주권의 상호존중과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과 상호이익, 평화공존 등 5개안의 조약으로, 이를 바탕으로 당시 중국의 2인자인 저우안라이 전 총리와 네루는 뉴델리와 베이징을 여러 차례 교대로 방문하며 다방면에서 협력 강화를 모색했다. 1947년 수세기에 걸친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인도는 미국 등 서방 세계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미·소 냉전이 본격화 되자 인도는 두 강국 중 어느 하나를 굳이 선택해 갈등 구도로 들어가는 걸 피하고 싶었다. 대신 제3세계 구상을 제시했다.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들끼리 서로 뭉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이지만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네루는 자신이 주도하는 '비동맹 외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오랜 내전 끝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웃 중국과 손을 잡고 형제처럼 지내야할 필요가 있었다. 1949년 신중국 탄생 이후 대부분의 서방국들이 오랜 기간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도는 달랐다. 네루의 인도는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을 침략자라고 부르길 거부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가입도 앞장서 주장했다. 또 네루 총리의 주도로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29개국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중국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재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소련은 중공에게 인도와 다투지 말라고 공개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인도가 자칫 추파를 계속 던지는 미국의 품안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잘나가던 양국 관계는 얼마 안가 국경문제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중국이 인도의 반발을 무시하고 1957년에 악사이친 지역에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티베트 자치구를 연결하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다. 악사이친을 둘러싼 양국의 수년에 걸친 긴장은 결국 티베트 문제로 폭발했다. 1959년 중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티베트의 대규모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한 사건이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정에서 인도가 은신처를 제공하고 티베트 내 반중 폭동을 교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데다 중국과 인도의 제3세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가열된다. 네루는 제3세계가 국제적 이데올로기 분쟁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마오쩌둥은 중국이 선도하고 싶은 반제국주의 글로벌 혁명에 제3세계가 동참하기를 원했다. 중국은 1961년 비동맹회의 참여를 거부했다. 양국의 팽팽한 긴장은 1961년 인도가 악사이친 지역에 수십개의 초소를 설치하면서 몇차례의 교전사태까지 벌어지는 상황으로 악화된다. 결국 중국은 1962년 10월 군사행동을 개시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세계의 지붕' 히말리야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중국은 네루를 보기좋게 한방 먹이고 한달 만에 실질통제선(實際控制線·LAC) 위로 군대를 갑자기 철수시켰다.   

최근 언론에 공개된 1958년 주중 인도대사를 지낸 파르타사라티(G Parthasarathi)의 일기를 보면 당시 네루 총리의 중국에 대한 속내를 엿볼 수 있다. 네루는 인도대사에 내정된 파르타사라티 대사를 불러놓고 판츠실 조약 서명과 "힌디 치니 바이바이(Hindi Chini Bhai Bhai)"라는 듣기 좋은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중국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인은 거만하고, 기만적이며, 위선적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 (The Chinese are arrogant, devious, hypocritical and thoroughly unreliable.) 1958년 3월 18일 파르타사라티 대사의 일기장에 적힌 네루의 중국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의미심장하다.

1962년 국경전쟁 이후 안보 분야에선 적대적 긴장감이 지속되었지만 인도가 1990년대 시장을 개방하면서 양국간 경제적 교류는 활발해졌다. 지금 양국은 서로 떼어내기 힘든 중요한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국경분쟁과 정서적인 반감에도 불구하고 알리바바나 텐센트 화웨이 등 중국의 첨단 기술기업이 인도에 진출하고 샤오미폰 등 각종 중국 상품이 인도인들의 일상에서 필수품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지난 4월 모디 총리가 인도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축소를 위해 중국 법인의 투자를 허가제로 바꾸었다. 코로나19 이후로 중국 대신 인도를 제조업의 글로벌 허브로 만들려는 모디의 구상까지 구체화 된다면 양국 관계는 국경 분쟁에서 경제 전쟁 단계로 넘어간다. 아직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만약 경제 전쟁이 핵보유국간의 대규모 군사충돌로까지 확대된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적 충격일 것이다. 

중국의 시 주석과 모디 총리 모두 양국이 한때 형제처럼 지낼 뻔하다가 전쟁까지 가야만 했던 상황을 이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나이이다. 당시 중국은 인도에게 아시아의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인도는 중국의 경제력과 기술 그리고 군사력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이다. 두 나라 지도자가 회동할 때마다 양국이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동등한 파트너라고 강조를 하지만, 이는 서로 듣기좋으라고 하는 얘기 일 것이다. 국경분쟁이든 무역문제이든 모디가 힘센 남의 도움 없이 1대1로 시 주석을 상대하며 중국의 양보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의미이다. 지난 15일은 시 주석의 생일이었다. 2016년 이래 매년 중국의 트위터인 웨이보를 통해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던 모디는 이번에는 생략했다. 2017년 도크람(중국명 둥량) 지역의 영유권 문제로 양국이 73일간 첨예하게 대치할 때도 모디의 생일 축하 메시지는 전해졌다. 모디가 이번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모디의 '힌두 민족주의' 열차와 시 주석의 '중국몽' 열차가 서로 마주보고 속도를 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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