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cracy 한국엔 '국가이성'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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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6-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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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출한 문명비평가 김용운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故 김용운 교수

 

 

 말년에 <풍수화(風水火)> <역사의 역습> 같은 문명비평서를 저술한 수학자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가 93세를 일기로 5월 30일 별세했다. 맥스미디어가 닷새 전에 출간한 <개인의 이성이 어떻게 국가를 바꾸는가>가 그의 유작(遺作)이 됐다.
그는 한 전공분야에 매달리는 외곬의 지식인이 아니라 역사, 과학, 수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종교학 등을 박람강기(博覽強記)한 학자다. 그런 면에서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나 <총, 균, 쇠>의 재러드 다이어몬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동앙이 화약·나침반·인쇄술을 먼저 발명했지만 실질적으로 활용해 군사력을 기르고, 대항해를 개척하고, 계몽시대를 연 것은 서양이었다고 지적한다. 동양은 화약을 불꽃놀이에, 나침반은 풍수지리에 주로 썼다. 서양에서는 인쇄술을 이용해 종교개혁을 가져온 인류 최대의 문화혁명을 이루었는데, 한국은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고서도 불교나 유교 경전을 찍는 데 그쳤다. 간지(干支)로 사람의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베스트셀러였던 조선 말기에 서양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과 뉴턴 역학이 나왔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바로 국가 이성의 차이다. 책의 영어 제목이 ‘Reason of State(국가 이성)’인 이유다. 이성은 생각이고 생각은 언어가 주도한다. 이성은 충동이나 감각적 욕구에 따르지 않고 사색의 결과에 기초해 스스로의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논증적이며 직관적이고 통합적인 사유를 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불가분의 대상도 위치를 바꾸어 관찰해 보고, 알고 있는 사실도 전체와의 관계에서 조망하는 능력이다.

인쇄술로 종교개혁 이룬 서양
경전만 찍은 한국···차이는 '국가이성'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이나 인간은 아직까지 그보다 더 나은 제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단이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한국이 당면한 정치·외교적 위기는 근원적으로 공동체(정부, 국가) 구성원의 이성 결핍에 있다고 판단한다. 정치가 툭하면 삭발 경쟁이 되고, 진보·보수가 데모 참가자 수를 과시하며 이를 근거로 정책을 결정하는 ‘데모cracy’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 군중 심리에 휩쓸리면 이성 대신 우성(愚性)이 앞설 수밖에 없다.
광화문 광장에서 이슈만 생기면 진보와 보수가 주먹을 들이대는 현상도 조선시대 사림파와 훈구파의 싸움과 맥을 같이한다는 시각이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는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민족은 항일과 친일로 갈라졌고, 국토와 민족도 양분되었다. 민족의 분열상이 심해지고 짧은 주기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한국의 대통령들은 김대중·김영삼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말이 불행해졌다는 분석이다.
조선시대의 학문은 주로 고전을 외우는 것이었다.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고전 공부는 창조와는 거리가 멀었고 창조적으로 해석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됐다. 우리가 수용한 중국의 철학은 본고장에서보다 더 원리주의로 경도됐다.
저자는 이성에는 한계가 없고 절대 진리도 사유방식의 일부일 뿐임을 논증한다.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후설, 러셀, 푸코 같은 철학자와 수학자 그리고 소쉬르,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가 이성의 역사를 썼다. 국가 이성은 하루아침에 뿌리 내리지 않으며 시민의 이성이 자라야 국가 이성도 성장할 수 있다.
그는 <풍수화>와 <국가의 이성>에서 한국사를 관통하는 갈등이 백제와 신라가 벌인 백강전투에 기인한다고 서술한다. 신라가 당(唐)을 불러들이자 백제는 왜(倭)와 손잡고 최후의 격돌을 벌인 것이 백강전투였다. 백강전투 이후 한반도는 줄곧 중국에 사대를 했고 우리의 역사에서 복수의 이민족이 동시에 개입한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6·25전쟁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유작 표지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의 경직된 원리주의가 판을 치면서 사회가 유연성을 잃었고, 병자호란 때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경직된 외교가 국토의 유린을 불렀다고 지적했다. 이런 원리주의 분위기는 오늘날 한국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국가 이성을 중시한 인물로 세종, 신숙주, 정약용, 김대중을 꼽는다.
세종은 소중화(小中華)의 원리주의에 빠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했고 수학적 사고를 권장했다. 일본 방문 경험을 토대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쓴 신숙주는 임종 직전에 성종에게 “일본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했다. 정약용은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일본의 잠재력을 정확히 평가했고 일본과의 교류를 중시했다.

세종·정약용·김대중 같은 '실용주의' 중요

저자는 역대 대통령들이 서로 경쟁하듯 반일노선을 걸었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인기는 올라갈지 모르지만 이런 비이성적 경쟁은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역사는 오늘의 잣대로 재지 말고 당시의 관점과 그 시대적 배경에서 바라봐야 오류가 적다"면서 동학농민운동 때처럼 일본을 향해 죽창가를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동이라고 일갈한다. 유일하게 김대중 대통령만 일본을 협력국가로 대우하면서 미래지향적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동북아에서는 완충지역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한반도의 중립화를 제안한다.
일본인이 쓴 ‘추한 한국인’이라는 책에 맞서 ‘추한 일본인’이라는 책을 썼던 그는 과거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잔다르크나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후손들에게 자존심을 살리는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며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필자는 국가의 이성이 출간된 직후 저자와 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박영배 맥스미디어 사장에게 연결을 부탁했으나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 사장은 저자의 연령과 건강상태로 볼 때 퇴원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전했다. 저자는 일본어를 비롯해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15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인생의 마지막 숨결처럼 경험과 지혜를 불어넣은 이번 유작에서 한국의 미래가 균형감각에 바탕을 둔 국가 이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필자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문득문득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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