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19)] 카뮈가 오랑을 '페스트'도시로 택한 이유는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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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논설고문
입력 2020-04-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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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숭호의 '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19)] 자신의 고향 알제가 페스트 더 창궐… 왜 굳이 경쟁도시 오랑을

[지중해 오디세이 19] 알제리 제2의 도시 오랑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알베르 카뮈(1903~1960,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소설 <페스트>가 새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국내외 언론들은 카뮈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 소설의 주제와 의의, 등장인물의 성격을 분석한 기사와 칼럼을 다루고 있고, 독서가들은 블로그에 감상문을 올리고 있습니다. 서점에는 출판사들이 새로 인쇄한 여러 종류의 <페스트>가 나와 있습니다. “전염병(페스트)이 만연한 도시에서 그 재난을 견뎌내는 인간의 희망적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라는 설명이 이런 관심을 불러내는 것 같습니다.
 

오랑의 전경[.]



소설의 무대는 알제리 제2의 도시 ‘오랑(Oran)’입니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서쪽으로 약 430㎞ 떨어진, 인구 150만 명의 항구 도시이지요. 이름이 짧고 예뻐서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오랑이라는 도시를 쉬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카뮈는 스물여섯이던 1939년에도 오랑을 소재로 한 에세이 한 편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이 ‘미노타우루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라는 이 글은 1953년에 출판된 산문집 <결혼·여름>에 다시 실렸는데, 그때 카뮈가 써 붙인 서문이 호기심을 더 불러일으킵니다.

“이 에세이는 1939년에 쓴 것이다. 오늘의 오랑이 어떠한가를 판별하기 위해 독자는 그때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온 열렬한 항의의 소리를 들으면 과연 나도 모든 결점들이 고쳐졌다는(아니면 고쳐질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이 에세이가 찬양하는 아름다움들은 반대로 소중히 보존되었다. 행복하고 현실주의적인 도시 오랑은 이제 더 이상 작가들이 필요 없다.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랑 시민들의 어떤 항의에 사과 혹은 해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지막 줄에서 뼈가 느껴집니다. “오랑은 더 이상 작가들이 필요 없다.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난 이제 니네, 오랑에는 관심이 없어. 이 천박한 자들아, 관광객이 던져 주는 거나 받아먹고 살아라. 문화가 없는 것들 …”이라는 뜻으로는 안 읽힙니까?

카뮈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곧 오랑에 돌아와 오랑을 소재로 <페스트>를 썼습니다. ‘미노타우루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의 어떤 부분이 오랑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나는 나중에 알아보고 <페스트>나 더 알아봅시다. 지금은 ‘역병(疫病)의 시대’이니까.

카뮈가 <페스트>를 발표하기 3년 전인 1944년, 오랑에서는 실제로 5건의 페스트가 발생해 시민들이 큰 공포에 떨었습니다. “5건 밖에 안 되는데 무슨 큰 공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오랑에서는 1732년, 1919년에도 페스트가 발생해 많은 인명이 희생됐습니다. 1944년의 페스트는 규모가 작았음에도 오랑 사람들에게 과거의 참혹한 기억을 불러냈을 겁니다. 그 끔찍한 기억에 빠진 오랑 시민들의 모습을 카뮈가 놓치지 않고 소설로 그려낸 작품이 <페스트>라는 거지요. 수천 만 명이 죽은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함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전쟁도 페스트처럼 조용히, 작게 시작되지만 금세 크게 번져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분노해 이 소설을 썼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오라 베르네의 '선상의 콜레라 환자들'[위키피디아]



지중해에서 페스트의 치명적인 습격을 받은 곳은 오랑만이 아닙니다. 지중해는 또 페스트 외에 콜레라, 천연두, 황열병 같은 전염병의 습격도 자주 받았습니다. 전염병을 다스리지 못해 나라가 망하고, 역사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지중해의 역사는 역병의 역사”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지중해의 대도시,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대학 병원(Aix-Marseille Université)은 2018년 ‘마르세이유와 지중해 연안의 전염병 2000년 역사’라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기원전 430년 티푸스로 추정되는 역병이 덮친 아테네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전염병이 발생한 곳을 표시한 지중해 지도에는 우리가 아는 웬만한 도시 이름은 다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알제, 아를, 바르셀로나, 나폴리, 카이로, 이스탄불, 피렌체, 예루살렘, 몰타, 마르세이유, 세비야, 튀니스, 베니스 등등….

제일 자주 발생한 곳은 마르세이유로 기원전부터 1920년까지 스물세 번입니다. 그 다음은 바르셀로나 열여섯 번, 알렉산드리아 여덟 번 등입니다. 역사가 오래고 규모가 큰 항구일수록 더 자주 습격을 받았고, 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사람과 물자의 교역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지중해는 실크로드의 종점이었다. 멀리 동쪽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물자에 묻어 온 세균들은 지중해의 항구를 통해 삽시간에 유럽으로 번졌다. 살아 있는 동식물에 숨어 있던 세균들은 무방비 상태의 유럽을 점령했다.” 전염병의 역사를 다룬 문헌 대부분에는 이런 묘사가 빠지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화의 산물로 해석되는 것처럼 페스트와 콜레라 등 과거의 역병도 그 시대 세계화의 산물이었던 겁니다.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전쟁, 이슬람의 서방 침략도 전염병 전파 경로였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전염병 전파 속도를 높였습니다. 1889년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독감은 불과 5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져 100만 명이 희생됐습니다. 새로 등장한 철도를 타고 번진 겁니다. 전쟁 중 전염병이 돌면 치명적이었습니다.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은 비좁고 비위생적인 막사나 참호에 침투한 전염병에 감염돼 숨졌습니다. 5000만 명이 발병해 최소한 1000만 명이 숨진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로마제국은 서기 180년 오늘날 이란 부근인 ‘파르티아’로 원정 갔던 군인들이 귀국하면서 옮겨온 천연두로 500만 명이 죽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군인들과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이 높아지고, 그 틈을 타 ‘구원’을 내세운 기독교가 발흥해 굳건했던 로마의 기틀이 흔들리게 됐다는 거지요. 로마제국은 결국 5세기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는데, 동로마도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인 541년에 발생한 페스트 때문에 쇠망하게 됩니다. 동로마는 527년 유스티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가장 융성했으나 페스트로 최소 2500만 명에서 최고 5000만 명이 희생된 후 영토가 줄어드는 등 나라가 약해지게 됐다는 겁니다.

1346년에 시작돼 1353년까지 진행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 시신 처리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원래 그런 일은 하인이나 노예가 했는데, 그들마저 숨져버렸으니 돈을 주고서라도 사람을 구해 시신을 매장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노예제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인력 대신 기술에 의지하는 시대가 오게 됐다는 겁니다. 전염병의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이런 사례를 들어 “역사는 사람만이 쓰지 않는다. 세균과 병균, 미생물도 역사를 써왔다. 어쩌면 그들이 써온 역사가 인간의 역사를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제 카뮈로 다시 돌아갑니다. ‘미노타우루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에서 카뮈는 오랑 사람들의 낙천적인 모습, 후지고 낡고 초라하지만 나름 특색이 있는 오랑이라는 도시 모습, 나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바위뿐인 오랑의 변두리 모습, 가난하고 부족한 삶에 대한 오랑 사람들의 즐겁고 태연한 ‘정신승리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나 몇몇 구절은 오랑 사람들이 화를 낼만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오랑의 길거리들은 먼지와 자갈과 더위에 바쳐져 있다. 비라도 오면 홍수져 진흙바다다. 한데 비가 오건 볕이 나건 가게들은 한결같이 엉뚱 야릇한 모습이다. 유럽과 중동의 모든 악취미들이 여기서 서로 만났다.” (이 뒤에는 조잡하고 요란한 싸구려 상품들이 너저분히 깔려 있는 상점 묘사가 이어집니다.)

“어쨌든 오랑의 대로들에는 하오가 끝나는 무렵이면, 불량소년 같이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는 밉잖은 청소년들이 밀어닥친다. 오랑 아가씨들은 자기들이 어느 때나 이런 다정다감한 강도들과 맺어질 것으로 자인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의 대 여배우의 화장과 멋을 과시하게 마련이다.” (카뮈에 따르면 오랑의 청년들은 당시 인기 있던 미국 배우 클라크 게이블처럼 보이려고 광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은 구두를 신고, 삐딱하게 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중해의)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살도록 강요당한 오랑 시민들은 어지간히도 보기 흉한 건축물들로 거리를 메움으로써 이 끔찍한 시련을 이겨냈다.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툭 트인 채 저녁 미풍에 씻겨 시원해진 도시를 기대한다. 그런데 (오랑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의 구역을 빼놓고는 바다에 등을 돌린, 달팽이처럼 맴돌게 만들어진 시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피렌체나 아테네와 같은) 도시들은 (생략) 감동시키거나 열광시킬 건덕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추억을 먹고사는 영혼의 어떤 굶주림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부추겨줄 아무것도 없는, 추함마저도 이름이 없고 과거가 무(無)에 가까운 도시에서 어떻게 감동될 수 있겠는가? 공허, 권태, 무관심한 하늘, 이런 곳들의 매력은 무엇들인가? (생략) 오랑은 그런 조국의 숱한 도시들의 하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다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전체적인 내용이 좋아봤자,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카뮈는 왜 이렇게 썼을까요? 카뮈가 알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랑 사람들은 알제 사람들에게 은근한 경쟁심-열등감에서 비롯한-이 있었습니다. 만년 2등들이 만년 1등에게 갖는 그런 심리 말입니다. 오랑 사람들은 카뮈에게 “이왕 좋게 써주려면 확실하게 써주지, 나쁜 소리 실컷 해놓고 좋게 쓰면 뭐 하나”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1등 도시 출신인 카뮈에게 격한 항의를 했을 것이고, 카뮈는 1953년에 이 글을 책으로 내면서 서문에 사과인 것 같으면서 뼈가 단단히 박힌 서문을 써 붙였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오랑에서 5건의 페스트가 발생한 1944년, 알제에서는 62건의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둘 중 어느 쪽 사람들의 공포가 더 컸겠습니까? 알제겠지요? 페스트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알제가 좋겠습니까, 오랑이 좋겠습니까? 역시 알제겠지요? 하지만 카뮈는 자신의 고향인 알제 대신 오랑을 소설의 무대로 삼았습니다. ‘미노타우루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에 대해 오랑 사람들이 카뮈에게 항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오랑이 소설 <페스트>의 무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안 드십니까?

내가 한국의 지역감정이라는 감정에 단단히 감염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뮈의 위대한 작품 <페스트>를 “알제리 사람들의 지역감정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헛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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