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닮은꼴' 핀란드의 생존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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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19-12-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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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0만이 1억7000만에 맞서다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핀란드를 다시 만난 건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신간 ‘대변동-위기 선택 변화’(김영사 2019년)를 통해서다. 핀란드는 과거 초강대국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독립을 지켜낸 걸로 유명하다. 저자는 국가의 위기 극복이라는 준거의 틀로 그 과정을 파헤친다(일본·칠레·인도네시아·독일·호주·미국의 경우도 함께 다룬다). 그는 몰랐겠지만 필자의 은사였던 고 이호재 교수(고려대)도 1973년 ‘약소국외교정책론’이란 저서에서 핀란드를 약소국 외교에 성공한 대표적 국가로 소개했다. 근 반세기 만에, 그것도 한국인들이 가장 애독한다는 스타 저술가의 저작을 통해 이를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2019년, 핀란드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오늘날 핀란드는 세계가 인정하는 부강한 나라지만 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러시아의 한 자치구에 불과했다. 1920년 독립하고 나서도 여전히 작고 가난한 나라였다. 그럼에도 전략적 요충지인 한코(Hanko) 항구를 비롯해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한 소련에 맞서 두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당시 핀란드 인구는 370만, 소련은 1억7000만이었으나 얼마나 용맹했던지 핀란드 병사 1명이 죽을 때 소련 병사는 8명이 죽었다고 한다. 1차 대소(對蘇) 전쟁(1939년 11월∼1940년 3월)과 2차 대소 전쟁(1941년 6월∼1944년 9월)에서 핀란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숨진 국민이 인구의 2.5%인 10만명에 달했다. 남녀 불문하고 군에 복무했고, 전란을 피해 5만명의 어린아이들을 이웃 스웨덴으로 피란 보내는 생이별도 겪어야 했다(대변동).

종전과 함께 패전국으로 전락한 핀란드는 승전국이자 교전국이었던 소련에 한코 대신 포르칼라(Porkkala) 해군기지를 50년간 조차해주고, 3억 달러의 전쟁배상금도 물어야 했다. 핀란드도 체코, 폴란드처럼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때 등장한 지도자가 파시키비(Paasikivi) 총리. 뒷날 대통령이 되는 그는 유능한 외교관 출신으로 대소 분쟁 때마다 협상대표로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이를 살려 대소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천명한다. 그 핵심은 핀란드가 처한 현실, 곧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인정함으로써 소련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핀란드의 독립도 안전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의 분출하는 민족감정을 달래며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바른 외교정책을 펴면 평화롭게 살 수 있고, 소련은 그러한 우리의 외교정책을 존중할 것이다. 우리는 반소적(反蘇的) 정책을 추구하지 않고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약소국외교정책론)

‘파시키비 노선’(후임 대통령인 케코넨의 이름을 붙여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이라고도 한다)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고위층부터 말단 관리까지 모든 계급의 소련 관리와 끊임없이 대화했다. 필요하다면 경제적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희생하더라도 소련(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과의 신뢰를 유지하고자 했다. 케코넨 대통령(재임 1956∼1981년)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핀란드 외교정책의 기본 과제는 핀란드의 지정학적 환경을 지배하는 이해관계에 핀란드의 실존을 맞추는 것이다··· 핀란드의 외교정책은 예방 외교다. 위험이 코앞에 닥치기 전에 미리 감지해서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 전쟁을 통해, 작은 국가는 외교정책의 해법에 공감이든 반감이든 감성을 뒤섞을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도 배웠다.”(대변동)

핀란드는 전후 70여년 동안 지정학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러시아의 위성국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구(西歐)와의 관계를 꾸준히 증진하면서도 소련(러시아)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냉전과 탈냉전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핀란드처럼 생존외교에 성공한 나라는 드물다. 다이아몬드는 국가적 위기의 해결과 관련된 12가지 요인 중 △책임의 수용 △울타리 세우기 △강력한 국가 정체성 △정직한 자기평가 △실패에 대처하는 자세 △유연성 △국가의 핵심가치 등 7가지 요인이 핀란드의 위기 극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나라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국가의 정체성과 핵심가치를 지키면서, 유연하게 대응했다’가 될 것 같다. 이호재 교수는 약소국이 독립(중립) 유지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모든 강대국에 우호적이어야 하며, 특히 자국(自國)과 가장 중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강대국에 그 중립에 대한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는 처음엔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아 실패했고, 나중엔 이를 지켜 성공했다고 그는 보았다.

그렇다면 핀란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뭘까. 물론 한국(한반도)과 핀란드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핀란드는 소련과 서구 사이에 끼인 나라이지만, 우리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끼여 있고, 그 안에서 다시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다. 직접 상대해야 할 강대국(패권국)만 4개국에 달한다. 게다가 우리가 답을 찾고자 하는 문제부터가 이율배반적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말했듯이 “동맹은 지키면서 냉전은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은 백번 옳다(이 말 속에 한국외교의 모든 과제와 딜레마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냉전 때문에 동맹이 생겼는데, 동맹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실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핀란드는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첫째는 의지와 용기다. 소련이 두 차례나 전쟁을 한 핀란드를 결국 끌어안은 것은 핀란드 국민이 보여준 결사항전의 의지와 불굴의 투지 때문이다. 소련 사람들의 뇌리에 핀란드는 건드리면 골치 아픈 존재로 깊이 각인돼 있다. 국가 간 관계에선 상대방이 두려워해야 할 이런 무기 하나쯤은 가져야 한다. 원로학자 이상우(전 한림대 총장)의 ‘고슴도치론’이 떠오른다. 일찍이 그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놓인 한국은 주변국들이 그 가시가 무서워서 함부로 밟을 수 없는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한·미동맹이 ‘가시’ 역할을 해왔지만 이게 핵무장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둘째는 설득과 소통이다. 핀란드가 소련을 설득할 때 보여줬던 그 집요함으로 주변국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국민에게만 “대화가 싫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라며 윽박지를 게 아니라, 그 에너지로 한·미동맹이 중국의 이익과 반드시 상충되는 건 아니라는 걸 납득시켜야 한다. 설득은 글로벌 공공재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 일 하라고 정부도, 외교관도 있는 것 아닌가. 동북아판 ARF(아세안 안보포럼)를 만들어 관련국들의 관·민(官民)이 함께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태국에서 출범한 ARF가 오늘날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역안보 포럼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셋째, 한국에도 파시키비, 케코넨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 지도자가 있어야 민족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필요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대소 전쟁 때 핀란드는 국내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소련에 맞서서 총을 들었다. 그들은 ‘진영 우선주의’ 대신 ‘국가 우선주의’를 선택했던 것이다.

중국 베이징과 청두(成都)에선 열린 한·중·일 3국 간 정상회담과 정상회의가 24일 모두 끝났다. 예상대로 사드(THAAD), 중거리핵전력(INF) 배치 논란,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따른 한·일 갈등,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제재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해선 어떤 진전된 논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만남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3국 정상 간 잦은 회동이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의 문제를 논의할 국제협력 거버넌스 구축에 도움이 될 걸로 믿는다. 초강대국(중국)과 강대국(일본) 사이에서 중견국(한국)의 역할과 행태에 관한 의미 있는 사례도 축적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다고 비난할 것만은 아니다. 핀란드로부터 보고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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