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영혼의 개벽은 어떻게 왔는가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입력 : 2019-12-23 15:22

[다석 류영모(그림과 글씨는 유형재 작)]




20세기 초 조선과 기독교의 만남

시간은 어떻게 밝아오는가. 그 허허벌판의 여명에 선 사람의 가슴에 불어오는 바람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땅의 1900년이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 거기 서 있던 사람의 눈으로 돌이켜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저 국치(國恥)의 시절에 무기력하게 우왕좌왕했던 기억과 망국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던 일들을 단편적으로 떠올릴 뿐이다. 20세기의 시작은 우리에게 깊은 부끄러움과 실패의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 부정적 기억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거기에서 눈을 돌려버림으로써 그 '중요한 시대의 시작'을 외면해온 것인지 모른다. 오늘은 소년 류영모가 되어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서서 그의 눈과 귀에 다가온 놀라운 것들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조선이 망하면서, 우리는 나라 없는 국민이란 모순을 떠안는다. 그런데 그 시대는 다른 의미에서 신생(新生)을 경험한 때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동안 각자의 문명으로 고유하게 발전해온 동·서양이 급박한 방식으로 조우하게 되는 문명사적인 전환기였다. 조선의 소년 류영모는 제국주의의 갑옷을 입은 일본을 통해서 혹은 서양에서 건너온 낯선 용모의 사람들에게서 지금껏 살아왔고 인식해왔던 세상과는 다른, 넓고 다양한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한다.

소년에게 이것은 세계관을 뒤바꾸는 혁명이었고, 모든 인식을 뒤흔드는 영혼의 개벽(開闢) 같은 것이었다. 류영모는 성경을 읽고 외국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서양'이란 블랙홀에 빨려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을 통찰해낸다. 기독교 속에 들어 있는 본질은 그가 이미 알고있던 동양적 사유체계를 용어와 개념만 달리 표현한 것이었을 뿐 동일한 '믿음'이었다는 점이다. 식민지 나라에 살고 있던 한 소년의 '생각' 속에서 동·서양이 서로 맞물리는 태극처럼 회오리치며 같은 궤도로 돌기 시작했고, 그는 누구에게도 배타적이지 않은 인류 보편의 '완전한 신앙'을 향한 평생의 미션에 나선다. 20세기 정신사(精神史)의 태동이라 할까. 갇히고 닫힌 땅 조선을 노크해온 기독교가 이미 '하늘'과 '도(道)'를 스스로의 원천이라 믿어온 이 땅의 선각(先覺)과 상봉하는 장면. 소년 류영모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었다.

왜 하필 그였을까. 왜 그에게 이 같은 깨달음과 대융합의 사건이 일어났을까. 그가 그 암담한 날들에 순정하고 빛나는 마음 한 줄기로 삶과 죽음의 오롯한 진리를 갈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시대의 흐름과 불변의 본질을 함께 읽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석 류영모선생과 김효정선생 내외. 생전 서울 구기동 집 입구에서. ]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정동YMCA의 추억

“조선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 다시 소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는 민족으로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데에 처음부터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신앙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03년 4월, 당시 조선의 기독교 선풍을 기록한 미국 내 ‘코리아 리뷰’(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의장 H.B. 헐버트의 기고)에는 이런 얘기가 실려 있다. 조선 청년들이 기독교에 비교적 저항 없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에 지녀왔던 신념체계와의 동질감 때문이라고 분석한 외국인 선교사의 관점은 인상적이다. 류영모 또한 그런 청년들 속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1844년 영국 런던에서 22세의 조지 윌리엄스가 중심이 되어, 산업혁명 이후의 가치 혼란으로 고통받던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자는 취지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방법은 ‘영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친교’였다. 유럽과 미국으로 뻗어나간 이 운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년 뒤였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85년이었고, 교회와 학교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교회청년회는 애국계몽의 선두에 서 있었다. 1899년 150여명의 청년들은 조선에도 YMCA 창설이 필요함을 역설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북미 YMCA국제위원회에 이 같은 뜻을 전했다.

북미 YMCA국제위원회는 조선의 요구를 접수한 뒤 D.W. 라이언을 보내 조선 현지 조사를 했고 회관 건립예산 5000달러를 책정했다.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서울 유니언회관(정동 공동서적실)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탄생한다. 초가집에 나무간판만 붙인 곳이었지만 모두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제임스 게일, ‘하나님’이란 말을 창안

헐버트가 의장이었고 제임스 게일(奇一) 목사가 헌장 초안을 낭독했다. 제임스 게일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토론토대학 YMCA의 후원으로 1888년 부산에 왔고 40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이 땅의 개신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명 기일(奇一)은 ‘낯선 사람’이란 의미도 되지만, ‘진기한 하나님’이란 뜻도 품고 있다. 그는 성서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1925년에 최초의 개인역 성경인 ‘신역신구역전서’를 낸다.

특히 그는 'God'의 번역을 천주로 할 것이냐 하나님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언더우드와 긴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란 독특한 우리말을 보편화시켰다. 게일은 당시 한성감옥에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감옥에는 이상재, 이승만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 일은 지식인들의 개종을 확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00년에 그는 서울 연못골 교회(연동교회) 초대 목사를 맡은 뒤 192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봉사를 했다. 그가 떠날 때의 한 마디는 “내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한국을···”이란 말이었다.

큼직한 서양식 건물로 YMCA가 새로 지어진 것은 5년이 지난 뒤인 1908년 12월이다. 게일과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이 주축이었다. 김정식은 YMCA 초대총무를 지냈다. YMCA 창설 초기에 연단에 나온 지사들은 안창호,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남궁억, 이승만, 윤치호, 김규식, 홍재기, 안국선, 신흥우 등이었다. 연설을 듣고자 서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 사람들도 올라왔다. 어른들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들도 모여들었다.

소년 류영모, 김정식 연동교회와의 인연

YMCA에 모여든 아이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서울 안동교회에서 13년간 목회를 한 김우현(金禹鉉)의 회고가 남아 있다. 그는 1895년생으로 류영모보다 5살 아래다. 1903년 10월 28일 8세의 서당학동이었던 그는 태화궁 사랑채에서 가진 청년회 모임에 구경을 갔다. “사랑채엔 갓 쓴 청년들이 앉아 있었고 양복을 입은 사람 둘이 나서서 연설을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안창호와 이승만 두 분이었어요. 그때까지 전 예수란 전혀 몰랐어요. 이곳에 자주 나가서 얘기를 듣다 보니 기독신자가 되었습니다.”

류영모는 언제 기독교에 입문했을까. 그는 13세부터 YMCA에 동생(류영묵)과 함께 자주 구경을 갔던 소년이었다. 2년이 지난 1905년 봄에 이 모임에 참석한 김정식(金貞植)이 연동교회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인이 됐다. 서당을 그만두고 경성학당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게 된 것도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를 기독교에 입문시킨 김정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정식은 요즘의 치안감쯤 되는 구한말의 고위 경찰관이었으나, 당시 도탄에 빠진 국가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협회에 동조하다가 국사범(國事犯)으로 1902년 3월 22일 투옥되었다. 김정식은 감옥에서 선교사 게일이 넣어준 신약전서를 읽게 된다. 4대 복음서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접하면서 그는 몹시 놀랐다. 자신의 억울함은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예수가 취한 태도는 너무도 의연했다. 신약전서를 7번 완독하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2월 25일에 무죄 석방이 되었다.

김정식이 직접 쓴 회개 입신의 신앙고백서가 남아 있다.

"허다한 죄상과 허다한 회포를 다 고할 때에 두 눈에 눈물이 비오듯 베개를 적시더니, 예수께서 손으로 내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되 네 회개함을 내 아나니 너무 서러워 마라. (......) 만일 이 몸이 옥중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그런즉 우리의 몸을 모함한 사람이라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맡길 뿐이로다."

무죄로 석방된 김정식은 게일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연동교회와 YMCA 일을 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한국인 목사가 없던 때이고, 선교사는 여기저기에 교회를 세워 나가니 모든 교회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김정식은 연지동 136번지,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애린당(愛隣堂)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에 주거하였다. 그때 연동교회는 판잣집에 볏짚 이엉을 덮은 건물이었다. 류영모는 "15세 때 성경을 보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하였다.

선교사 게일의 설교 "이게 꿈일지라도 좋은 꿈입니다"

1905년 봄부터 류영모는 서울 연동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이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12년이 되고 개신교가 들어온 지 22년이 된 때이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이 나라에서 기독교 신자의 증가는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기록이었다. 1884년 알렌이 이 나라에 와서 개신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1907년에 이미 기독교 신자가 10만명에 이르렀다. 

류영모가 연동교회에 나간 1905년에 이 교회는 늘어나는 신도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한 해 동안에 판잣집 교회당을 세 번이나 뜯어서 넓혔다. 1907년 연동교회에 등록된 신자가 어른이 550명, 주일학생이 800여명이 되었다.

연동교회에 다닐 때의 일을 류영모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일요일 오전에는 연동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승동교회에서 연합예배를 보았어요. 그리고 밤에는 새문안교회에서 밤 예배를 보았어요." 그때는 한국인 목사가 없었고 선교사들이 직접 목회를 하였다. 류영모가 다닌 연동교회에서는 선교사 게일이 주로 설교를 하였다.

류영모는 그때 들은 게일의 설교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선교사(게일)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가 사는 이게 모두 꿈인지 몰라요. 그러나 꿈이더라도 깨우지는 마세요. 나는 지금 좋은 꿈을 꾸고 있어요. 여러분 모두 나와 같이 좋은 꿈을 꾸어 봅시다'라고요."

우리말로 옮긴 성경은 신약성경이 1887년에 나오고 구약성경은 1910년에 나왔다. 류영모는 아브라함을 아백라한이라 옮긴 중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읽었다. 류영모는 연동교회에 다닐 때 산 신약전서를 일생 동안 고이 간직하면서 날마다 읽었다. 1909년(대한 융희 3년 기유년) 미국 성서공회가 출판한 것으로 실제로 인쇄하고 제본한 곳은 일본이었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갈 때도 이 신약전서는 들고 갔다.

# 다석어록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장6절-개역성경) 하느님이 주신 얼나(성령의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얼나와 길, 얼나와 진리, 얼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이며, 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이며, 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편집 및 정리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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