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파르헤지아]누가 새를 죽이고 있나, 공명지조(共命之鳥) 대한민국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9-12-21 21:23
진영논리를 혁파하려면, 대동과 탕평을 하라...대통령은 진영을 벗고나와, 선거 개입 의혹 떨쳐내야

[전설의 새, 공명지조.]



# 대한민국 진영논리 위기를 일깨우는 우화

[이상국의 파르헤지아] 나무 한 그루가 수백미터를 뻗어나가 그대로 숲을 이루는 반얀트리(Banyan Tree) 둥지 속에 살았다는 공명지조(共命之鳥)는 불교경전인 아미타경에 등장하는 새입니다. ‘공명조’는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새라는 의미입니다. 이 새는 샴쌍둥이처럼 하나의 배아가 정상적으로 분리되지 못해 생겨났을 전설의 쌍두조(雙頭鳥)입니다. 몸은 하나이되 머리가 둘인 새로 히말라야 설산 일대의 실크로드 지역에 살았다고 합니다.

지난 15일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 1046명을 설문조사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를 골라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죠. 공명지조가 걸어간 운명이 현재의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위기를 일깨워주는 우화(寓話)이기 때문일 겁니다.

같은 몸을 가진 두 새는 늘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습니다. 한 머리는 잠을 자려고 하고 한 머리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한 머리가 이것이 먹고 싶다고 하면 다른 머리는 저것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한 머리가 여기로 가고 싶다고 하면 다른 머리는 저쪽을 가리킵니다. 생각이 이러니 몸이 찢어질 판입니다. 거기에다 두 개의 머리는 서로를 질투하거나 의심했습니다.

한 머리가 달고 맛있는 과일을 베어 물었을 때, 다른 머리는 왜 너만 그걸 먹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내가 먹으면 너도 역시 배가 부르니 좋은 일일 것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수긍하지 않았지요. 그래도 입으로 맛있는 걸 즐기는 건 네가 아니냐고 투덜댔습니다. 투덜대는 머리를 향해, 너는 한몸에서 생겨나 그리도 속이 좁으냐고 혀를 찼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난 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죠. 저놈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문득 눈에 띈 독과(毒果)를 베어 뭅니다. 두 머리를 달고 있던 새는 허우적거리며 지상에 추락해 죽어가고 맙니다. 부처가 이 어리석은 새를 비유로 택한 까닭은,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많은 부정한 감정들이 결국 자해와 자멸을 부르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한 교수(최재목·영남대 철학과)는 “서로를 이기려고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함께 죽게 되는 것을 살피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낱말을 선택한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공명지조에서 두 개의 머리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 스토리는 '머리'라는 지엽(枝葉)보다 '몸통'이라는 근본(根本)에 주목하라는 근원적인 깨우침을 담습니다. 물질문명이 번성을 이루면서 인간은 지엽말단(枝葉末端)에서 많은 것을 얻었으며 경쟁적으로 발전시켜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본질인 정신의 황폐를 방치하게 된 것도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서양의 천주교와 기독교, 동양의 불교와 유교·노장사상은 용어나 설득하는 체계는 저마다 다르지만 공히 인간이 지닌 마음의 뿌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뿌리를 일상용어로 우리는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지엽의 과오가 죽이는 것은 몸통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해온 양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공명지조는 근본과 본분을 잊고 일탈한 우리 사회에 양심회복을 촉구하는 묵직한 정언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그 양심의 새를 누가 죽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반환점을 돈 지금, 조국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이후 여야 갈등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 진영논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처음의 맑은 기본과 반듯한 원칙과 당연한 상식을 잃어버린 어리석음이 2019년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 진영은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진영논리가 문제일 뿐

‘공명지조’는 두 개의 머리로 표현되는 이 땅의 양대 진영 모두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다를 것이 없다는 양비론(兩非論)은 위험합니다. 문제는 ‘진영 논리’에 있는데, 진영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비판하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방법론의 차이를 지닌 진영의 존재는 자연스럽습니다. 진영의 존재와 진영논리가 구별되기 위해선, 진영이 달라도 서로 공감하고 공유하는 지점을 인정하고 허용해야 합니다. 진영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보편과 상식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공명지조가 서로 다른 진영을 아우른다면, 그것은 두 진영이 추구하는 처음의 목표가 같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진보든 보수든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공동체가 잘 되도록 하려는 의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목표는 같고 그 방법과 속도와 전략이 다를 뿐입니다. 공명지조의 양 진영이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존재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들이 무성하던 춘추전국시대 묵자(墨子)는 당시 지식인들을 이렇게 꼬집습니다.

“사람이 열이면 주장도 열 가지, 사람이 백이면 주장도 백 가지다. 주장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강조하게 되고 타인의 주장은 그르다고 고집하게 된다. 그래서 늘어나는 것은 남에 대한 비판뿐이다.”

이걸 지켜본 순자(荀子)는 말합니다.

“주장을 하려면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발언을 하려면 이치를 갖춰야 한다(持之有故 言之成理).”

근거와 이치가 소통되는 것만이 제대로 된 의견교환이라는 얘기죠.

진영논리(陣營論理)는 자신이 속한 진영의 생각과 이념과 행동은 무조건 옳으며, 다른 진영의 생각과 이념과 행동은 무조건 배척하고 비판하는 논리를 말합니다. 진영이 곧 판단의 기틀이다 보니, 순자가 말한 '근거'와 '이치'는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진영에 맞게 근거와 이치를 재구성하기에 바쁩니다. 진영논리는 흑백논리의 연장이며, 선악구도가 정해져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진영논리로 무장한 언론들은 '팩트'를 진영논리에 맞게 재구성하는 솜씨를 보입니다. 옳고 그름은 편집되고 정리되고 가감되어 표현됩니다. 다양한 사실이나 진술 속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받아들여지고 불편한 이야기는 회피합니다. 진영논리는 '선택적 지각'을 부릅니다. 결론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과 배치되거나 결이 다른 정보는 무시되거나 비판적으로 다뤄집니다.

‘진영(陣營)’이라는 개념은 그 낱말의 원래 뜻이 그렇듯이 전쟁 용어에서 나왔습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 공동진영을 구축하고 같은 방식으로 구축된 상대진영과 싸우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진영’이란 생사를 가를 만큼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같은 진영에 있었던 이들은 피를 나눈 동지이고, 다른 진영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적이요 악마였습니다. 적은 오직 제거하거나 패퇴시켜야만 상황이 안정되는 것이 전쟁입니다. 진영에 대한 집착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았습니다. 이념을 기반으로 한 냉전은 진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줬지요.
 

[조국 전 법무장관. 사진=연합뉴스]



#조국장관 소용돌이로 불거진 '진영논리'

이 나라는 60여년 전 이념 갈등으로 인한 한반도 전쟁과 분단을 겪었고, 여전히 휴전상태로 냉전위기를 떨칠 수 없이 감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북의 대치에 따른 긴장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거기에 남쪽 내부에서 깊어진 이념적 이견 또한 상당한 국가갈등 요소로 커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축되어 있던 글로벌 진영의 이합집산 속에서 냉전시대의 공고하던 진영적 연대가 불안정해지거나 해체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진영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국가안보력을 포함한 국력으로 자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진영이 유효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외교적 지혜가 더욱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국내는 어떻습니까. 김대중-노무현 정부시대 이후 두 번째로 이 땅의 진보정권이 국가의 운전대를 잡은 상황으로, 오랜 기득권을 누려왔던 야권 세력과의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정치·경제·사회·외교가 새로운 ‘진영’의 가치와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2년여 동안 좌충우돌의 양상을 빚어왔고, 정책들은 의욕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외교 또한 ‘유효타’가 없는 시행착오들의 연속이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대북과 안보정책, 교육문제, 거기에 여야 갈등은 어느 때보다도 심해졌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타협정신은 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입니다.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이 힘을 얻으면서 ‘진영’이라는 개념이 불거집니다. 정부와 국민이라는 국가 요소의 정상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아닌 진영논리가 개입되어 혼란의 양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국 법무장관의 임명과 사퇴 과정에서 국민이 두쪽 나는 듯한 치열한 대립을 겪었고, ‘진영’은 이제 상징적이거나 이념적인 지형을 떠나 구체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신원(身元)을 불심검문하는 명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진영논리의 핵심은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으로서의 옳고 그름이 폐기되고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따져 그것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결정하는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부족이나 부덕이나 부실이나 무능이 ‘진영논리’에 얹혀 엄호되고 진지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것은, 그 진영논리가 걷혔을 때 감내해야 할 비판과 단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이후에 맞았던 ‘된서리’를 트라우마처럼 지니고 있는 이 권력이 필사적으로 정권재창출을 외치는 까닭도, 권력다툼을 거의 ‘전쟁’과 같은 수준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강박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이것은 정치시스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국가와 국민이 여전히 산업화-민주화시대 60년의 굴레였던 후진적 진영 갈등을 밀레니얼 신(新)글로벌 시대에까지 끌어와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영의 혁파는 오직 대동과 탕평에 있다

‘공명지조’의 어리석음을 한탄해본들, 진영논리 속에서는 저마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진영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진영논리의 구조화를 비판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은 아무리 정교해도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국민들을 두 토막 내고 상호불신을 극대화하고 국정 자체가 제 구실을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진영논리.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진영을 혁파하는 것뿐입니다. 진영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전쟁이 낳은 그림자입니다. 이념은 사회의 행복과 국가의 성취를 어떻게 더 높일 것인가의 방법론이며, 그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견들이 상당 부분 정리되어온 것들입니다. 우리가 낡은 이념과 지난 전쟁을 껴안고, 그 진영논리 속에서 좁은 속셈을 펼치며 살아야 하는지 진심으로 반문해볼 때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진영의 가치를 참고하고 중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직 진영의 울타리를 치고 자신만의 나라를 설계하는 어리석음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돌이켜볼 때가 되었습니다.

진영의 혁파는 대동과 탕평에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많은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근거와 이치의 타당성을 살피는 일입니다. 모든 정책은 그 출처가 누구이며 어느 쪽인가를 살필 일이 아니라, 이 나라의 큰 경영에 적실(適實)한 것을 과감히 채택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대동’을 이끄는 존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탕평(蕩平)’은 인재를 쓰는 개방성입니다. 권력의 사연(私緣)은 엄정히 배제해야 하고 나라 전체의 인재풀을 놓고 허심탄회한 개각과 임용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진영논리’의 적폐를 씻어내는 길입니다.

‘진영’을 흩어낸 자리에 국민 하나하나의 격(格)을 살려내 그 민주주의 주체의 권위를 돋우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분별하고 자발적인 정치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성을 돋워야 합니다. 경제적 선진화 또한 중요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국민 하나하나의 선진화가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진영’은 피해의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똘똘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전시대의 전쟁논리입니다. 어떤 이념과 진영에 속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집단에 매몰된 자아’를 구출해줘야 합니다. 그들이 ‘진영’부터 살피며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내지 않고, 주장이나 행동의 합리성에 주목할 수 있는 ‘진정한 민심’의 한 몫으로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문재인대통령. 사진=연합뉴스]



# 대통령은 '진영'에서 나와, VIP의혹을 언급해야

어떻게 보면 격정적이고 다이내믹하기도 했던 한 해를 보내면서, ‘공명지조’는 한번 개탄하고 지나갈 일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이 나라의 뿌리깊은 문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저 말은 ‘진영’들을 공격한 말이 아니라, ‘진영논리’ 자체를 비판한 말임을 기억합시다. 고질적인 진영논리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주체적 인격과 의견을 지닌 ‘독립적 자아’로 나오라는 선진화 시대의 요구를 귀담아 새겨야 합니다. 국민을 '진영'의 일원으로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집단의 목소리와 집단의 얼굴 속에서 본래의 얼굴과 상식을 잃어버린 국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영과는 다른 의견도 내놓고 다른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 다양한 자아와 가치와 비전을 드러내는 독립적인 의견주체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대통령 또한 이제 그 전쟁터의 '진영'에서 나와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 위한 큰 몸짓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고형(固形)을 깨는 치열한 고해성사가 필요한 때가 아닐지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청와대 관련 수사들은 ‘권력’이 된 진영의 예민하고 치명적인 영역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속속 드러나는 울산시장 선거의 비정상적 상황이나 유재수 감찰무마 정황은 이 땅의 최고권력자에게 ‘무도(無道)’를 심문하는 양상으로 읽힙니다. 수사의 칼끝이 겨누고 있는 문제들을 ‘진영의 문제’로 만들어 방호하고 엄호하는 것 또한 오래된 고질병의 연장선일 수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추호의 의심이라도 살 일이 있었으면, 모든 불이익과 불명예를 감수하고 국민에게 필요한 만큼 언급하고 해명을 하는 것이 국격(國格)을 돋우는 길입니다. 여러 개의 머리를 지닌 새를 살리기 위해서는 각각이 건전하고 건강하며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머리 하나하나가 생명의 주체이며 판단의 전위(前衛)일진대, 그 '머리'가 국가지도자라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밝히는 일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얼버무리거나 가리거나 침묵을 늘이는 일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통령의 양심은 국가 전체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이 보고 싶은 것은 선하고 능력있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도덕적 품격이 높은 대통령이 아닐지요.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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