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자의 가수 도전기] ② 대형기획사 오디션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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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수 기자
입력 2019-12-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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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이어집니다. [강기자의 가수 도전기] ① 인디뮤직의 성지 홍대 클럽에 가다(https://www.ajunews.com/view/20191205143340778)

백지의 공포를 아시는가.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채워 나가야 하는 공포. 흰색이 그렇게 무서운 색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비단 창작하는 사람만 느끼는 공포는 아닐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취업준비생도, 제안서를 작성해야 하는 직장인도 '자, 이제 시작해 봐'라고 얄밉게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막막함을 느낀다. 결과물을 보며 품평하기는 쉽다. '내가 하면 더 잘하겠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괜찮다. 그러나 쓴 것들을 두세 번 버리고 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백지의 공포가 심장을 옥죄여 온다. 이게 막 쓴다고 가사가 되는 게 아니구나··· '난 음악의 신이 아닐까. 청소하면서 노래를 만들다니' 생각하면서 흥얼거린 그건 노래가 될 수 없구나··· 그랬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가사가 대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수요일에 홍대 앞 '클럽 빵' 오디션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지만, 나의 곡은 쉽사리 탄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 답답한 마음에 회사에서 대중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선배 장윤정 기자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선배는 말했다. "인디신으로 도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에요. 음악을 만들고, 보여주고, 입소문이 나야 공연도 하고 활동하는 거니까."

선배는 이어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제안했다. "차라리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한번 보는 건 어때요? 그건 일단 합격, 탈락이 빠르게 나뉘잖아요" 오픈 마이크의 실패로 이 기획이 가능할지 의기소침해 있던 차. 빠르게 3대 대형기획사 오디션을 알아봤다. 그러나 여기서도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기획사는 한 곳뿐이었다.
 

오디션 지원에 나이 제한이 있는 YG, JYP. [표=강지수 기자]


3대 연예기획사 중 SM과 JYP는 정기적으로 공개오디션을 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소속사는 SM 한 곳뿐이었다. YG와 JYP는 오디션 지원 자격에 당당하게 나이를 써 붙여 놓았다. YG는 1999년생, 만 20세까지 오디션 지원이 가능했고, JYP는 1995년생, 만 24세까지 오디션 지원이 가능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어린 나이'에 시작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 제한이 없는 소속사가 왜 하필 SM일까. 연예부 선배의 말에 따르면 SM은 외모를 가장 많이 보는 소속사라고 했다. 애초에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작은 일탈에 나서는 마음으로 지난 7일 SM을 찾았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에 위치한 SM엔터테인먼트 셀러브리티센터. 매주 토요 공개오디션이 열리는 장소다.[사진=강지수 기자]


날씨가 영하 8도에 육박했던 그날,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에 위치한 SM엔터테인먼트 셀러브리티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SM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 SM 본사는 청담역 근처로 이전했지만 2015년까지는 이곳이 SM 본사였다. 이곳은 오랫동안 공개오디션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 또한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05년 '제2의 보아'를 꿈꾸며 이곳에서 두 번 오디션을 봤다. 당시 지원자들은 다소 낡은 듯한 상아색의 SM 사옥 바깥에 줄을 서서 본인의 차례를 기다렸다. '딸칵'하면 데워지는 손난로를 양 주머니에 넣고 부르르 떨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겨울이 떠올랐다. 그 때도 추운 날씨였지만 마음은 비장했다. 오늘 이곳에서 누군가의 눈에 띄어 내 인생을 바꿀 엄청난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 번은 SM 관계자가 나에게 남아서 기다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당시 나는 8번이었고, 오디션이 끝나기까지는 500명 이상을 기다려야 했었다. 이렇게 제2의 보아가 되는가! 심장이 떨렸지만 250번으로 넘어갈 때까지 3시간 이상을 대기하고 있다가 보니 무서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부모님께 비밀로 하고 오디션에 갔기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어디 갔다 왔어!' 하는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SM 관계자가 "화장실 가실 분들 다녀오시죠" 하고 건물 밖으로 지원자들을 데리고 나갈 때, 나도 함께 나왔다. 나는 화장실을 갈까, 집에 갈까 고민하다가 집에 가기로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부모님의 불호령이 무엇보다 무서웠을 때이므로.
 

오디션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 지원자들. 왼편에서 스티커를 받아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오디션 대기실이 있다. [사진=강지수 기자]

이제 다시 15년만에 찾아간 오디션장, 센터 앞에 다다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캐주얼 차림의 남성 직원이 "오디션 보러 오셨냐"고 물으며 '38번'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줬다. 나는 12시쯤 센터에 도착했는데, 38번째로 온 지원자인 것 같았다. 직원은 "옷이나 머리에 가려지지 않게 옷 왼쪽 상단에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말했다. 카메라 촬영을 위해서였다.

안내해주는 곳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자 50석 정도의 의자가 놓여 있는 대기실이 나왔다. 대기실에는 의자만 놓여 있었고, 벽에는 'SuperM'의 사진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날렵하고 매끈한 턱선을 강조한 사진들. 실물보다 200배는 커 보였다.

자리에 앉으니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 직원이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나눠주었다. 성명, 국적, 생년월일, 학교/학년, 응시 분야, 신장/체중, 주소, 연락처를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는 경력 사항을 적는 란, 그리고 오디션 지원경로를 표시하는 란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학력'란에 쓸 내용이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1,000일이 좀 넘었던가(강지수, 27세). 어찌할지 알 수 없어서 비우고 제출하자 방금 그 직원이 다가와 "학력란을 채워달라"고 했다.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내가 기재한 생년월일을 쓱 보더니 "쓸 내용이 없으면 최종학력만 적어달라"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약 50명의 지원자 중 45명 정도가 중·고등학생들로 보였다. 나머지 5명도 많아야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10살께로 보이는 남자아이도 있었다. 혼자 온 지원자들이 20명 정도 됐고, 나머지는 친구들과 함께 오디션에 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들에게 막 부임한 학교 선생님 정도 될까?
 

오디션에 들어가기 전 작성해야 하는 서류. [사진=강지수 기자]

"이제부터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은 12시가 되자 곧 오디션이 시작된다고 안내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들어갈게요." 앞의 두 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자기소개, 인사하지 않고 하이라이트 먼저 불러주시면 됩니다. 끝나면 들어가셨던 길 그대로 짐 챙겨서 나가시면 됩니다." 5명이 먼저 오디션 장소로 들어갔고, 나머지 5명은 뒤에 서서 대기했다.

곧 방 안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여성 지원자들은 태연의 'Rain', 아델(Adele)의 'Hello', 정인의 '오르막길', S.E.S.의 '감싸 안으며', 조용필 원곡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등을 불렀고, 남성 지원자들은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 엠씨더맥스의 '어디에도', izi의 '응급실' 등을 불렀다.

네 명 중 한 명꼴로 팝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노래가 아닌 댄스를 준비한 사람들도 있었다. 댄스를 준비한 사람들은 같이 들어간 사람들의 노래가 끝나면 재생되는 곡에 춤을 췄다.

지원자들은 대체로 40초에서 1분 정도 노래를 불렀다. 겨우 후렴을 부를 수 있는 정도였다. 엠씨더맥스의 '어디에도'를 부른 사람은 '그대 내게 오지 말아요.'라는 소절에서부터 '나를 천천히 잊어주길' 정도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함께 들어간 5명이 오디션을 마치고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오디션을 마친 사람들이 걸어 나오면 대기자들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늘 읽기 힘든 법. 대기자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준비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원자들은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고치거나, 가사를 외우거나, 긴장을 떨치기 위해 같이 온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지원자는 여중생으로 보였는데, A4용지에 노랫말을 뽑아서 줄곧 외고 있었다. 백아연의 곡이었다. 지원자의 친구가 물었다. "하던 거 할 거야?" "모르겠어. 이거 부르고 싶은데 애들은 다른 게 낫다고 다른 거 부르래." 그리고 곧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날 SM에서 받은 번호표. 기념으로 보관해 두기 위해 옷에서 떼던 중 찢어져 버렸다. [사진=강지수 기자]


오후 12시 40분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차례가 돌아오니 잠잠하던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내가 부르기로 한 노래는 홍진영의 노래 '사랑의 밧데리'였다.

그날 '아빠 차'를 혼자 몰고 오디션 장소로 가며 이런저런 노래를 흥얼거려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사랑의 밧데리'를 불러 봤는데, 그날따라 평소 음이탈을 남발하던 '사랑의 밧데리↗가 다 됐나 봐요' 부분이 너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 아닌가. 나는 잠시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지원자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차별화된 선택이야', 난 뿌듯해하고 있었다.

오디션 장소로 들어가자 맞은 편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 여성 직원 한 명,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여성 심사자 한 명이었다. 앞머리 없는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는 안경까지 쓰고 있어 지적인 느낌을 팍팍 풍겼다. 나름대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많이 봤는데도 그런 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안경 바깥으로 지원자들을 꼼꼼히 평가하겠다는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 분위기에 긴장한 나머지 앞의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잠시 넋을 놓았다. 면접에 들어갈 때의 자세처럼, 두 손에 깍지를 껴 배 위에 다소곳이 올려둔 채로.

"38번" 별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의 위치를 바꿀 겨를도 없이, 동요대회에 나가는 어린이처럼 '사랑의 밧데리'를 불렀다. 그날 트로트를 부른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밧데리가 다 됐나 봐요." 여전히 양손은 배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채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선곡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세도.
 

이 자세로 '사랑의 밧데리'를 부르고 왔다. [사진=인천서부소방서 제공]

내 차례가 끝나고 평가하는 분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여전히 읽기 힘든 표정.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진 않은가 살폈다. 그런 것도 같았다.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표정에서 이번 주 SM과 나의 인연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다음 지원자는 끈적한 R&B를 불렀다.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허리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그녀의 두 손은 다소 사선으로 세워진 채로 허리와 함께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평가하는 분의 표정이 조금 달라 보였다. '나도 노래방에서는 저렇게 하는데'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말해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지원자가 몰리는 기획사 오디션에 '두 번'은 없다.

SM 오디션은 다음 주에도 열릴 것이었다. 그러나 대기하는 내내 가사를 외우던 지원자들에게 이 하루는 매우 중요한 하루였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는 꿈을 향해 스스로 도전할 기회가 많지 않다. 지금은 기획사 공개오디션을 통해 연습생을 발탁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오디션을 마치고 나오는 길, 이날 오디션에 참석한 유일한 흑인으로, 프랑스에서 온 나탈리(18)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나와 함께 오디션에 들어간 5명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오늘 아델(Adele)의 'Hello'를 불렀다.

그녀는 BTS를 좋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달 전 한국에 왔다고 밝혔다. 그녀는 "가수가 꿈"이라며 "지난 주에도 SM에 오디션을 보러 왔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처럼 지난 주에 오고 또 온 사람들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녀는 격주로 열리는 JYP 오디션에도 한 번 참가해 봤다고 말했다.

나탈리는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디션에서 한 번에 가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면서 "매주 공개오디션에 참석해 내 실력을 다진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한국에서 매주 공개오디션을 여는 기획사가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프랑스에는 '더 보이스(The Voice)'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가수 오디션을 경험할 수 있다"면서 "매주 열리는 기획사 오디션이 모두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탈리는 다음 주에 다시 SM 오디션에 올 것이라며, 나에게도 오겠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 돈 노"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백지의 공포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상 앞으로, 건반 앞으로 돌아가야지. 홍대 클럽 오디션 무대에 서 보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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