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모스크바한국학생총연합회 초대회장, 한승범 맥신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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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서 기자
입력 2019-12-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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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첫 총학생연합회 출범식 및 체육대회 최초 교민행사’

  • ‘박신양 모스크바 유학 뒷이야기’

한러수교 30주년을 맞아 모스크바유학생회에 대한 요구가 새삼 거론되고 있다. 이에 1994년 총학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낸 한승범 맥신코리아 대표(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에게 당시 상황과 연합회의 결속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승범

- 당시의 유학분위기를 좀 전해 달라.
 
한승범: 1991년 소련에 유학을 갔다. 윈스턴 처칠 말대로 ‘철의 장막 (Iron Curtain)’에 가려진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의 기대감, 초조함, 공포심은 아직도 생생하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 내내 울었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잘 알다시피 혼돈과 격동의 시기였다. 썩은 양배추와 못 먹는 통조림만 있던 가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연방이 해체된 후 모스크바 유학생 수가 급증하기 시작해 1994년 500여명에 달했다. 유학생들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다. 자가용을 가진 유학생이 극소수여서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간혹 스킨헤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우울한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 유학생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돼 힘든 시기를 보냈다.
 
- 총학생연합회의 출범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한승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유학생들은 힘이 없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학생수가 500여명에 달했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간혹 나오는 아르바이트는 학연 위주로 이뤄졌고 대부분 유학생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1994년은 모스크바 유학생에게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분열과 반목을 뚫고 드디어 모스크바유학생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엠게우) 학생수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혹 다른 대학교는 들러리나 서지 않나하는 우려와 불신이 유학생회 출범을 막았다.
 
1994년 초 오작교식당(현 삼미숯불)에서 7개학교(혹은 9개) 학생회장들이 모여 난상토론 끝에 1학교 1투표권으로 회장을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투표는 의외였다. 듣보잡이었던 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렇게 어렵게 탄생한 모스크바한국학생총연합회는 엠게우의 배려와 관용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당시 김선국 엠게우 회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당시 총학생연합회의 구성>
고문-한상용 공과대학연합, 회장-한승범 므기모, 부회장-김선국 엠게우, 총무-김경도 그네신, 학술부장-김상환 이메모, 섭외부장-김용필 루데엔, 김소영 사범대학, 박성옥 통역대학 , 유선희 컨세르바토리, 준비위원장-김태훈 쉐프킨연극대학교, 준비위원-방주영 통역대학, 편집위원-김영옥 므기모
 
- 총학생연합회의 역할과 실제 한 일 또는 행사 등이 궁금하다
 
한승범: 우연히 혹은 기적에 의해 설립된 총학생연합회는 완전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500여 학우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각 대학을 찾아다니며 총학생연합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와 동시에 대사관과 지상사에게 우리 존재를 알려야 했다. 이때 김선국 부회장의 ‘넓은 발’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넓고 사람은 많다. 이들 모두를 만나 우리 단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이것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총학생연합회 출범식 겸 체육대회였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모든 행사는 돈이 든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지상사의 도움이 우리 단체 성공의 열쇠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김수철 대한항공 모스크바 지점장이 커다란 도움이 됐다. 모스크바 서울 왕복 항공권 2매를 경품으로 쾌척했다. 특히 이 분은 우리 총학생연합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이득순 상사협의회 회장은 우리에게 귀인이었다. 거액을 기부하신 훌륭한 분이다. 척박한 땅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아들 딸 같다며 여러 번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신인철 삼성항공 지점장은 나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거액을 강제 기부했다.
 
그 외에도 대우전자, 럭키금성, 삼성물산, 코오롱상사, 한국일보, 현대종합상사, TST, 한세여행사, 인터시그날, 창투어랜드, 대한일보, FAX러시아(현 겨레일보), 신라식당, 아리랑식당, 한국관, 한양식당에서 기부해주었다. 총 1만불 이상의 기부금과 수천달러에 달하는 식사를 제공받은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기부받은 돈은 단 1달라도 헛되이 쓰지 않고 임기 말에 후원하신 모든 분들과 전체 학생회에 종이로 출력해서 결산보고했다. 제대로 회계처리되지 않은 비용은 내 개인 돈으로 메우는 비운을 겪었다.
 
출범식 및 체육대회는 쩨스카 운동장에서 600여명이 참석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모든 것을 총괄 지휘한 것은 김태훈 준비위원장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그를 영입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대회는 누구나 칭송할 정도로 완벽하게 치러졌다. 600여명이 신나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위대한 추억이다. 모스크바 유학생의 하나의 역사였다.
 
- 회장활동 시 기억나는 에피소드나 추억거리가 있다면...
 
한승범: 완벽하게 준비되던 체육대회가 전날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600인분의 김밥 후원을 약속했던 한인식당에서 예기치 않은 사정으로 취소되었다는 급보를 받았다. 놀랄 겨를도 없이 전 학생회에 긴급 소집령을 내렸다. 그리고 김상환 학술부장과 계란 500개를 사기 위해 밤에 베트남 기숙사에 갔다가 특수경찰(아몬)에게 잠시 체포되는 불상사도 겪었다. 여하튼 새벽에 한인식당에 모여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긴급 소집된 20여명의 유학생들이 밤새 600인분의 김밥을 만든 기적을 만들었다. 아침에 완성된 김밥을 보고 우리는 실로 감격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밤에 봉고차에 납치되면 밤새 김밥 싼다는 우스개소리가 생겼다.
 
신이 있다고 믿는가? 체육대회 때 왕복항공권에 당첨된 사람은 전날 도둑을 당했던 학생 부부였다. 절대정신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600명 중에 당시 가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당첨될 수 있겠는가?
 
- 현재 해체된 연합회의 부활에 대한 의견은?
 
한승범: 25년이 흘렀다. 어디를 막론하고 조직화되지 않으면 모래알과 같다. 혼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유학생은 외롭다. 유학생은 나약하다. 유학생은 힘이 없다. 하지만 유학생회는 즐겁다. 유학생회는 강하다. 유학생회는 힘이 있다.
 
나는 1994년 연합회를 조직해 꿈과 추억을 팔았다고 생각한다. 유학생회를 하면서 시기, 질투, 반목도 있었지만 내내 즐거웠다. 학생회를 하면서 우리들은 꿈과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
 
베트남 기숙사에서 아몬에게 같이 체포되었던 김상환 학술부장은 지금 한국기술벤처재단 김상환 창업센터 센터장으로 있다. 체육대회 총지휘자였던 김태훈 준비위원장은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가 되었다. 체육대회 점심시간에 멋진 공연을 펼친 박신양 쉐프킨연극대 학생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자가 되었다. 학회지 ‘더불어’ 김영옥 편집위원은 루터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연합회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권원순 한국외대 교수, 유영철 국방연구원 박사, 김덕주 국립외교원 교수, 정태수 한양대 교수,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에게 유학생회 이름으로 감사드린다.
이 모두를 하나로 만든 것은 유학생회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 박신양 씨의 얘기를 더 해 달라.
 
한승범: 체육대회 때 미소년 같은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공연을 하고 싶단다. 임원들이 모두 결사반대했다. 일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의 애절한 눈을 본 순간 그에게 왠지 모르게 빠져들었다. 회장인 내가 직권을 남용(?)해 허락했다. 박신양 씨의 공연은 약속과 달리 시간을 훌쩍 넘겨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로 인해 오후 일정이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공연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형이상학적이었고, 모두 눈을 떼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박신양 씨는 유학생 때부터 남다른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박신양 씨는 떡잎부터 달랐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때 그의 사인을 못 받은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 초대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한승범: 자랑스러운 후배들에게 조언할 위치에 있지 않지만, 내가 부족했고 아쉬웠던 것을 말한다. 즐겨라. 마음껏 즐기라. 너무 도서관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껏 즐기라. 넓디 넓은 러시아연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녀라. 러시아인들과 보드카를 마시며 그들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독서를 하라. 여러분은 책과 여행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세상을 품기를 바란다.
 
- 마지막으로 연합회 이후 활동에 대해 얘기해 달라.
 
1994년 김영삼 대통령 방러 시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방러 시에는 청와대 근접경호 통역을 맡았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한승범씨[1]


1998년부터 3년간 KBS ‘세계는 지금’과 ‘일요스페셜’ 십여 편의 프로그램을 기획, 코디, 통역을 했다. ‘빅토르 최 10주기’ 프로그램은 내가 PD로 직접 제작해 KBS에 팔기도 했다.
 
 
◆한승범 소개 / 10년간의 러시아유학을 마치고 한국외대와 한양대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했다. 2006년 김문수 경기도지사 사이버팀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20kg 넘는 초고도비만으로 온갖 성인병과 우울증, 알콜중독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했다. 설상가상 크게 성공했던 프랜차이즈 사업 실패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러나 2014년 6개월만에 45kg 감량에 성공하며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중의 한사람으로 재탄생했다.(A채널 쾌도난마 출연)
 
이후 온라인평판관리 회사를 국내 최초 설립하여 성공신화를 다시 썼다. 현재 기업위기관리 전문기업 맥신코리아 대표와 비영리법인 한류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이다. 저서로 <한승범의 기업위기관리>가 있으며 퍼스널 브랜딩, 다이어트와 건강 관련 서적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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