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인문학]하마터면 열심히 안 살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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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9-05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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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근로자들이 여름 휴가를 마친 8월 12일 울산공장 명촌정문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 회사는 주말을 포함해 지난달 3∼11일 모두 9일간 여름 휴가를 보냈다. [연합뉴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제목의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 역설적인 책 제목에 이 시대가 크게 공감한 까닭은 뭘까. 아마도, '열심(熱心)'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인 권유와 강요와 주장과 훈계와 암기와 기계적인 반복동작 따위를, 그 제목 하나가 일거에 작파하기 때문이 아닐까. 열심이라는 말은 마음에 온기를 돋워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어떤 결과를 내는 데 마음을 사용하는 지혜이다. 그 긍정적인 말이 워낙 흔하게 쓰이다 보니 본질적인 뜻을 잃어버리고, '열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 동작의 피곤함과 부질없음 따위의 우스꽝스러움만 남은 껍데기말이 된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이제 막 신앙이 떨어지는 찰나에, 누군가가 "그까짓 기도를 왜 해? 그만해"라고 핀잔 주는 것을 듣기만 해도 기도를 뚝 끊는 것처럼, 열심 종교를 파계하는 일도 그처럼 흔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로 종교생활을 바꾸는 순간, 세상의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무엇인가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깊이 있는 소통이나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잃어버린, 무심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부전지 정도는 달아주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강요당해온 세상의 모든 것들에 있는 것이다. 그놈들을 빼고 다른 것들을 만나면 절로 열심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열심의 '종목'을 갈아타는 지혜, 지금껏 아무도 이걸 열심히 할 줄은 몰랐던 것들에서 발견하는 남다르고 색다른 즐거움.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열심의 부작용은 종목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생길 가능성이 더 많다.

우리는 37.5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온혈동물이다. 이 온도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수해야 하는 목숨의 온도이기도 하다. 인간의 많은 생각과 느낌은 온도에서 발생한다. 몸이 그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면, 마음은 어떨까. 마음 또한 일정한 온도가 필요할지 모른다. 체온보다 낮은 심온(心溫)이 필요할 때는 냉정을 기울여야 할 때다. 흥분으로 올라간 몸과 마음의 온도를 내려서 분별과 통찰을 되찾는 방법이다. 이 냉정은 방어적인 마음의 움직임이어서 태도나 생각을 수동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때로 무심한 마음이 되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때도 있고, 의욕이 일어나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열심'이다. 열심은 마음을 집중시켜 열기로 변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 열기는 에너지가 되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한다. 사랑과 같은 아름다운 감정이 일어나는 지점도,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열심'의 어느 등성이다. 슬픔이나 아픔 또한 마음이 따뜻해진 거기 어디쯤에 있다. 마음이 식으면 사랑도 식고 슬픔도 식는다.

공부도 마음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옛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멋진 말을 남겨놓았다. 옛날의 글이나 물건이나 생각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활물화하는 과정을 옛공부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옛것을 살려내서 지금의 새로운 것들에 대해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온고지신이다. 인간이 축적해 놓은 지나간 지식들을 생생하게 활용하는 이 지혜는 열심이 없으면 닿을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껏 산 인생 중에서 열심이 가져다준 만족감도 많았고, 열심 때문에 나 스스로가 바뀐 것도 많았으니, 저런 제목을 보며 미안해서 '열심'을 열심히 변호해 보는 중이다. 다만, 최근의 조국 법무장관 후보와 관련해 흘러나온 '하마터면 열심히 공부할 뻔했다'는 유행어가 마음에 걸리긴 한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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