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용의 CEO열전] ⑮ 러시아 정부에 기업 뺏긴 젊은 억만장자...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反독재 선봉

강일용 기자입력 : 2019-08-31 11:02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 VK에 이어 텔레그램 창업... 위기를 기회로 바꿔 전 세계 암호화 메신저 시장 장악
그 열기가 꺼지지 않고 있는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시위는 다른 말로 '텔레그램 시위'라고도 불린다. 약 13만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이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 채팅방에 모여 시위를 계획하고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수십에서 수백명이 모인 소규모 텔레그램 채팅방을 통해 게릴라성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굳이 홍콩의 사례를 들 것 없이 지난 몇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반정부 운동이 텔레그램을 중심으로 계획되어 실행되었다. 텔레그램이 서버에 이용자 데이터를 남기지 않고, 모든 대화내용을 누구도 모르도록 암호화해서 처리하는 암호화 메신저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텔레그램은 어떤 계기로 만들어진 것일까? 여기에는 부당한 공권력에 자신이 세운 기업을 몰수당한 한 젊은 사업가의 아픔이 있다.

◆러시아의 젊은 억만장자가 푸틴 정부와 대립한 사연

대기업이 국가 이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가 상식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에나 통하는 얘기다. 독재 국가에선 권력자(Strongman)에게 밉보인 기업인이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으로 텔레그램의 최고경영자인 파벨 두로프(Pavel Valerievich Durov)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사진=플리커 제공]


두로프는 러시아를 비롯해 동유럽권 최대의 SNS '브콘탁테(VK, VKontakte)'의 창업자이자, 2억명 이상의 월 활동 사용자(MAU)를 보유한 세계 최대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의 창업자다. 두 번의 창업을 모두 대성공으로 이끈 신화적인 비즈니스맨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 이면에는 큰 아픔이 있다. 2014년 4월 21일 두로프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인 VK의 CEO 자리에서 해고당했다. 겉보기엔 이사회의 의결에 따른 평화적인 CEO 교체였으나, 실제로는 러시아 정부의 외압에 따른 축출이었다. CEO 자리에서 축출당한 두로프는 바로 고향인 러시아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두로프는 1984년 10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는 36살로 매우 젋다. 그의 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언어학 교수였고, 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해 러시아보다 해외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두로프 역시 유년 시절 대부분을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두로프가 러시아의 답답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린 시절을 자유로운 이탈리아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2001년 러시아로 돌아온 두로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해 언어학을 공부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두로프는 서방 세계의 페이스북이라는 서비스를 접하게 된다. 페이스북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커뮤니티성은 두로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내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권에도 페이스북과 같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필요하게 되리라고 직감했다. 두로프는 자신과 함께 창업에 뛰어들 파트너로 그의 친형을 골랐다. 두로프의 친형인 니콜라이 두로프는 수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였다. 파벨 두로프가 CEO를 맡고, 니콜라이 두로프가 CTO를 맡아 2006년 9월 페이스북과 유사한 SNS인 VK를 출시했다. VK는 서비스를 선보인지 불과 6개월만에 10만 명의 가입자를 모으며 순항했고, 2008년에는 경쟁 SNS인 오드노클라스니키(Odnoklassniki)를 제치고 러시아 최대의 SNS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VK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등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하는 동유럽권에서 페이스북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게 된다.

VK의 성공으로 두로프는 러시아에서 제일 어린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다. 러시아 정부와 유착이 있거나, 호황을 누리던 러시아의 에너지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가만이 누리던 지위를 20대의 젊은 나이로 획득한 것이다. 두로프는 특유의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2012년 두로프는 VK의 성공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명목으로 5000루블짜리 지폐로 종이 비행기를 만들어서 밖으로 뿌렸다. 하늘에서 돈이 쏟아지자 길거리는 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서 VK와 트위터에 올린 후 "축제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모습은 짐승같을 뿐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진=플리커 제공]


이렇게 잘 나가던 두로프의 삶은 2012년 이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2011년 총선과 2012년 대선 직후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을 규탄하는 반푸틴 시위가 급격히 늘어났다. 시위대는 VK를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시위 장소를 정했다. 2011년에 일어난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 페이스북이 큰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시위대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두로프와 VK에 반푸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시위대와 반정부 인사의 VK 페이지를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해 철권통치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두로프는 이러한 러시아 정부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렇게 곪을대로 곪은 두로프와 러시아 정부의 관계는 2013년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서 파국으로 치닿는다. 러시아 정부는 두로프에게 협조 공문을 보내 유로마이단에 관련된 인물들의 개인 정보를 요구했다.

2013년 12월 두로프는 이러한 정부의 협조 공문을 자신의 VK 페이지에 폭로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정부에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5일 후 푸틴과 러시아 정부의 물리적 보복을 피해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카리브해 동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 국가인 세인트키츠앤드네비스에 25만 달러를 기부하고 시민권을 얻었다. 세인트키츠앤드네비스는 1984년 이후 많은 경제적 기부를 하면 시민권을 내주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어 정치적 망명지로 각광받는 나라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는 반정부적 행보를 보이는 두로프를 더 이상 가만히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친정부적 성향을 보유한 러시아의 인터넷 서비스 기업 메일루(Mail.Ru) 그룹을 앞세워 두로프로부터 VK의 경영권을 뺏었다. 메일루 그룹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두로프와 주주들로부터 VK의 지분을 사들였다. 현재 VK는 메일루 그룹이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로, 두로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014년 이후로 VK에서 반정부적 성향을 보이는 게시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반독재 메신저 '텔레그램'을 만들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강제로 매각한 두로프에게는 약 3억달러의 자금이 남아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돈을 가지고 안락한 삶을 택했겠지만, 두로프는 달랐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개인 정보를 저장하지 않고 모든 대화를 암호화해서 전송하는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을 만들어 다시금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었다.
 

[사진=텔레그램 CI]


텔레그램은 파벨 두로프와 니콜리아 두로프 형제가 2013년 8월 출시한 메신저 서비스다. VK를 러시아 정부에 빼앗기고 만든 서비스가 아니다. 빼앗길 것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해둔 보험이다. 두로프는 러시아 정부와 척을 진 2012년부터 이미 VK를 대신할 새로운 사업을 설계하고 있었다.

텔레그램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사용자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암호화해 제 3자가 이를 감청하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는 것이다. 대화 내용을 암호화할뿐만 아니라 대화 내용과 사용자 정보도 중앙 서버에 저장하지 않는다. 서비스 구조 상 정부가 어떤 개인 정보를 요구하든 제공할 수 없다. 이점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경제적 이유로 많은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다른 메신저 서비스와 차별화된다.

개인 정보는 21세기의 새로운 캐시 카우다. 많은 SNS와 메신저가 개인 정보를 수집, 분석한 후 이를 바탕으로 광고를 띄워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페이스북의 개인 정보 유출 사태도 이러한 사업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SNS와 메신저의 사업구조는 개인정보 유출에 민감한 사용자들에게 반감을 심어주었다.

때문에 정부의 감시를 피하려는 중국, 러시아의 사용자들과 초거대기업의 개인정보 수집을 피하려는 미국, 한국의 사용자들이 기존 메신저의 대안으로 텔레그램을 선택했다. 일반 대화는 많은 사용자가 이용하는 메신저로 하되 비밀 대화는 텔레그램으로 하는 식이다. 이른바 세컨드 메신저 시장이다. 과거 세컨드 메신저는 일상과 업무를 분리하기 위해 이용되었으나, 현재 세컨드 메신저는 일상과 비밀을 분리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텔레그램은 보안을 추구하는 세컨드 메신저 시장의 선두주자다. 2억명이 넘는 월간 활동 사용자수를 보유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이용되는 메신저 가운데 하나다. 시그널 등 경쟁 서비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텔레그램의 아성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

◆IPO 대신 ICO 선택... 특정 국가와 기관에 종속 거부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사진=페이스북 캡처]


텔레그램은 별다른 비즈니스 모델 없이 두로프가 보유한 자금 3억달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운영됐다. 때문에 두로프의 자금이 바닥나면 서비스가 중단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사실 이렇게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지 못하는 것은 텔레그램뿐만 아니라 보안을 추구하는 세컨드 메신저 시장 전반이 겪고 있는 문제다.)

두로프는 이러한 문제조차 특유의 반정부적·아나키스트적 성향을 활용해 돌파했다. 정부의 규제를 받는 자금공모방식인 IPO(Initial Public Offering, 기업공개) 대신 ICO(Initial Coin Offering, 암호화폐공개)를 추진해 투자자들로부터 텔레그램 운영자금을 제공받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두로프와 텔레그램은 2번의 걸친 ICO를 진행해 총 17억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175명의 익명 투자자들로부터 1인당 평균 900만달러의 자금을 투자받았다. 이로써 텔레그램의 기업가치는 20억달러 수준에 도달했고, 텔레그램의 암호화폐인 '그램'의 시장 규모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이오스 등과 대등한 암호화폐 생태계를 이루게 되었다.

ICO란 기업이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이를 IPO처럼 기관 투자자나 일반 투자자들에게 판매해 자본(실제화폐)을 조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자자들은 이 암호화폐를 다른 투자자와 거래하거나, 기업의 서비스 생태계에서 실제 화폐처럼 이용할 수 있다. 오는 10월 발행될 예정인 그램 역시 텔레그램 서비스 내부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등 실제 화폐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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