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편집의눈]아베에 분노하는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할 이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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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8-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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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전대통령의 시 '세월이 오며는'과 일본지식인 160명의 합창

[옥중 투쟁 시절의 김대중 선생.]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넓은 광장에서 춤을 추면서
깃발도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얼굴 부벼댄 채 얼싸안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눈물과 한숨은 걷어치우고
운명의 저줄랑 하지 말 것을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입춘의 매화가 어서 피도록
대지의 먼동이 빨리 트도록
생명의 몸부림 끊지 말아요

----- 김대중의 '세월이 오며는(오면은)'
 

[젊은 시절의 정치인 김대중.]



1972년 김대중선생이 일본에서 망명할 때, 독재정권의 살의가 들끓던 무렵에 저 노래를 지어 불렀다. 눈물과 한숨을 걷어치우고 운명의 저주일랑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돌보는 신은 죽지 않으니 생명의 몸부림을 끊지 말자고, 그는 노래를 불러 꺼져갈 듯한 자신을 다시 호명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만나겠다고, '세월이 오며는'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일본의 문학가 다카하시 유지(高橋愈治)는 김대중선생의 노래에 곡을 붙여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 부르게 했다.

1980년 11월7일 일본 도쿄의 전덴츠(全電通)회관에는 일본의 지식인 160명이 모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투옥된 김대중선생을 돕기 위해서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김대중선생의 '세월이 오며는'을 합창하며 투옥된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역해 모두가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노랫말처럼 넓은 광장에서 춤을 추면서 깃발도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얼굴 부벼댄 채 얼싸안자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시인 김광림은 1997년 '나무'라는 동화집으로 유명한 일본시인 기지마 하지메(木島始)를 알게 되어 서로 편지를 하며 지냈다. 하지메는 2000년 5월에 김광림에게 김대중선생의 '세월이 오며는'에 곡을 붙인 악보를 보내줬다. 그 또한 1980년 전덴츠 모임에서 이 자료를 받아 간직한 것이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를 겪었고, 이웃나라로서 일본과의 불화를 여러 차례 겪긴 했지만, 일본 전체를 '악(惡)'으로 보거나 적으로 삼아선 안된다는 걸, 저 김대중 전대통령의 일화는 말해준다. 아베라는 특정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과 망집에 가까운 신념이 빚어낸 이번 일련의 사태를, 일본 전국민에 대한 증오나 적개심으로 확대해서는 안되며, 한국에 대해 호감이 있거나 적어도 적대감을 갖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한국의 위기나 곤경을 보면서 마음과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을 함부로 매도해선 결코 안된다.

그건, 일본의 '저열한 태도'를 꾸짖으면서 스스로가 품위와 양식을 잃는 모순적 태도이기도 하다. 지금의 분노는 마땅하지만, 분노의 대상을 이웃국가와 국민 전체로 확장해선 안된다. 전시대 전쟁의 어리석음이, 이후 수백년을 고통으로 얼룩지게 하는 결과를 우린 역사를 통해 너무나 많이 보지 않았는가.

김광림 시인이 2004년 기지마 하지메가 작고했을 때 썼던 시 한 수를 읽으며, 지금 분기탱천하여 일본과 전쟁이라도 치를 듯 격해진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 보는 건 어떨까.

병든 몸이기 때문에
고작 7년 밖에 사귀지 못한
이웃나라 시인 기지마 하지메

목소리가 안 나와
전화 통화도 못 하고

우리가 일제의 강점에서 풀려난
바로 그 전날에 해당하는 8월14일
그대는 병고에서 해방되어
훌쩍 저승으로 가버렸으니

그대가 언제나 편지 속에 그려넣은
전각과 판화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그대의 장시
'일본공화국 초대대통령에의 편지'를
한글로 옮겨 발표한 보람을
새삼 반추하고 있으니

              김광림의 '새삼스레 반추하면서'(2013. 1)
 

,[연합뉴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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