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인문학] 동인도회사와 한·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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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미 기자
입력 201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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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부사장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 세계에서 처음 만든 주식회사다. 대항해시대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주체는 원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형 선박단들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여러 사업자가 같은 사업을 하게 되어 경쟁이 심해지는 것보다 대규모의 자금을 모은 한 주체가 통합된 선박단의 사업을 꾸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런 초대형 선박단을 꾸리려니 큰돈이 필요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투자한 자금을 꼬박꼬박 상환해야 하는 채권이나 어음으로 그 돈을 충당하기에는 선박단의 비즈니스는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정부는 위험한 사업이라도 큰 자금을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였는데 그 결과로 1000명이 넘는 주주로부터 막대한 자본금을 마련한 거대기업 동인도회사가 탄생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회사에 무역독점권을 부여했다. 무역대상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무역소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 선전포고할 수 있는 권력까지 줘 출자금 모집을 도왔다.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세워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활발히 거래토록 하였고 암스테르담 은행을 세워 회사의 외환거래를 도왔다.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전세계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한때 유럽 최강국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거대 주식회사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금융시스템이었다.

네덜란드에 앞서 영국에서도 동인도회사를 1600년 정부 주도로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 회사는 주식회사 형태가 아닌 상인조합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투자자들이 (57명으로 알려져 있다) 모은 적은 돈으로 출범했던 이유다. 한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세에 눌려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1657년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주식회사로 변경되고 나서야 상황이 달라진다. 사세는 확장되었고 1690년부터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직접 인도를 통치하게 되는 등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공신이 되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식민지 지배, 크고 작은 전쟁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악역을 도맡는 수단이 되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본주의 초기,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였던 이 회사들이 나라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때부터 주식회사들의 국가경제에 대한 영향력은 커지고 커졌다.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이 우리나라에서 시가총액이 큰 주식회사들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미국 주가는 사상 최고치 수준에 있고 주변국가들의 주식시장도 호조세를 보이는 가운데 유독 한국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한다. 현재 일본과 대만의 주식시장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6배 수준임에 비해 한국의 PBR은 0.8배 수준이다. 순자산이 100원인 기업이 일본과 대만에서는 평균 160원에 거래되는데 한국에서는 80원에 거래된다는 얘기다. 올해 한국기업의 이익이 작년에 비해 낮아진 것을 감안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차이다. 주가수익비율(PER)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대만은 약 16배 수준인데 한국은 올해 그렇게 기업성과가 저조해도 11배 수준이다. 일본과 대만에서는 10원을 버는 기업의 주가가 평균 160원인데 한국에서는 110원에 거래되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 한국은행에서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주식시장은 시큰둥했다. 지금의 경제문제는 시중에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자본시장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국가경쟁력의 상승도, 경제성장률의 반전도 기대할 수 없다.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매 패턴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못할 때 필요한 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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