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 불참한 유림들 자괴감…임정 외교문서로 된 독립청원서 들고 유럽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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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건 인턴기자
입력 2019-04-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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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일 국회서 '유학자들의 파리장서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사진=안효건 인턴기자, 파리장서운동100주년 학술대회]

 
"1919년 독립항쟁 당시 유림들도 사력을 다해 뛰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137명의 유학자들 이름으로, 임시정부 공식외교 문서인 독립청원서를 만들어 프랑스 파리의 국제회의에 전달한 것이 파리장서입니다."

지난 15일 국회에서 유림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파리장서 운동에 관한 재조명이 국회에서 이뤄지는 것은 처음이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심산 김창숙 선생(1879~1962)이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바 있기에 더욱 뜻깊다.

홍윤정 실장(심산김창숙기념관 학예실장)은 이날 발제에서 “유림들은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못했기에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를 매우 부끄러워 했다”면서 이런 자괴감이 파리장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파리장서의 가치는 임시정부 승인을 받은 공식외교문서라는 점"이라고 밝힌 그는, "전국의 유림 137명이 서명에 참여했기에 지식인을 대표하는 문서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파리강화회의가 1차대전 승전국끼리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였는지라, 이 독립청원이 실질적인 효력을 지니기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국제적인 무대에서 우리의 입장을 천명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는 작지 않다는 게 홍실장의 평가였다. 

 

[사진=안효건 인턴기자, 학술대회 기념촬영]

김상기 교수(충남대)는 호서지역의 파리장서 운동을 설명해 눈길을 끈다. 김교수는 “학파와 지역이 서로 다른 영남과 호서 지역 유림들의 장서운동 통합은 민족운동사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지금 극심한 갈등을 겪는 우리 국회도 이런 통합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호서지역의 유림들은 “영남본의 뜻이 잘 갖추어지고 분명하다”하여 자신들의 안(案)을 양보하고 영남본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황직 교수(숙명여대)는 파리장서 운동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3·1운동보다 늦게 추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장서운동이 ‘뒤늦게 유림 몇몇이 해외에 보낼 청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였지만 그 독립정신을  전국화하는데는 유교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유림은 전국 곳곳에 조직망을 지니고 있어서 서울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목격한 유학자들이 저마다 귀향하여 3.1운동 상황을 전파했기에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상적인 '파리장서'의 한 구절이다.


 

[사진=안효건 인턴기자, 파리장서의 내용]


“피를 뿜으며 결심을 털어 놓고 고개를 들어 부르짖는 바는 실로 뼈아프고 박절하여 참을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제위는 적이 살피시어 우리 한국도 천하만상의 일국이니 국토가 삼천리요 인구가 2천만이니, 4천여 년을 유지하고 보전하여 반도 문명의 일컬음을 잃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만방에서 제외치 못할 국가이니라”

이날 행사에는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와 유승엽 의원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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