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영상톡]"대한제국 궁중미술서 시작한 근대미술의 놀라운 재발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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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 기자
입력 2018-11-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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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15일~2019년 2월6일까지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전시

  • -김규진 변관식 안중식 채용신 등 대한제국 작가 36명의 200여점 작품

  •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대 미술의 토대 집중 조명"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 배경이 됐던 대한제국 때의 미술은 어땠을까? 고종이 나라를 세운 1897년부터 순종에 이르러 경술국치로 일본에 주권을 뺏긴 1910년까지의 짧은 13년간의 대한제국, 그리고 궁중미술의 영향이 계속 이어지던 상황 속에서 서양식 화법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1920년대 중반까지 미술을 조명해보고 근대 미술 태동의 실마리를 조심스럽게 찾아보는 전시가 열렸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고종임진연도병' 10폭 병풍을 설명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1890년대부터 1926년까지의 한국 근대미술을 조명하는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전을 지난 15일부터 2019년 2월 6일까지 개최한다.

시기적으로 대한제국은 고종(1852~1919)이 나라를 선포한 1897년부터 순종(1874~1926)이 경술국치를 맞이한 1910년까지 1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종이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1890년대부터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범위로 산정했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1910년 이후 1926년의 기간에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이왕가가 존재하던 시기였지만, 미술품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며 "미술품들이 고종 이후에 추진된 정책이 지속해서 확산하는 그러한 결과물들을 낳았기 때문에 맥락적으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한국의 근대미술사 연구는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가 개최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던 1930~40년도 미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를 조명하고 있어 20세기 전반의 미술을 객관적이고 입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전시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대한제국 시기는 비교적 짧은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으로 20세기 미술의 기반을 닦았던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며 "외부의 문화를 거부하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기존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대한제국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됐던 매우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간 당시 미술품도 전시 연구에서 소외된 측면이 컸다.

마리 관장은 이어 "이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규명을 하지 않은 다면, 근대미술에 대한 연구도 절름발이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며 "이번 전시는 바로 이러한 근대미술의 사막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써 회화, 사진, 공예 등 대한제국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한국 근대 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는지를 집중 조명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의 미술은 외부의 새로운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련 간의 변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어느곳보다도 고종의 의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던 궁중의 미술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전시에서 대한제국의 다름 아닌 궁중미술에 초점을 맞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김규진, 변관식, 안중식, 채용신 등 대한제국 시기 대표작가 36명의 회화, 사진, 자수, 도자, 금속 공예 등 총 200여 점을 통해 대한제국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한국 근대 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집중 조명한다.

전시는 1부 '제국의 미술', 2부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 4부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로서의 화가'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1부 '제국의 미술'

1897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면서 궁중 미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황제가 된 고종의 위상에 맞춰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의 용포(龍袍)와 의장물이 어진과 기록화에 새로이 등장했다.
궁중회화 또한 서양 및 일본 미술 등의 사실적이고도 세밀한 화풍을 수용, 변화를 꾀했다. 이러한 면모는 궁중회화 이상으로 보수성이 강한 당시의 불교 회화에도 등장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채용신의 '고종 어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은 대한제국의 건국 이후 황제의 위상과 제작방식에 있어서 서양 미술의 도입을 잘 보여준다.
검은 익선관을 쓰고,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황룡포 차림의 고종은 금박으로 용머리로 장식한 붉은 옥좌에 앉아 있다. 얼굴, 의복은 서양식 명암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고종임진연도병' 10폭 병풍은 고종 등극 40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병풍이다. 병풍에는 관리들의 달라진 복식과 신식 군대, 태극기 등 대한제국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해학반도도']


12폭의 대형 병풍인 '해학반도도'는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채색과 금박을 활용하여 10마리 학을 그렸다. 화면 전반에 활용된 금박은 대한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일본을 거쳐 지금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호놀룰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신원사 소장 '신중도']


공주 신원사 소장의 '신중도'는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을 그린 불화지만, 그림 중앙에 대한제국의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있는 호법신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이 불화는 근대기 불교화회 제작자들이 전통적인 밑그림과 표현에서 벋어나 새로운 불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2부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2부에서는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들이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대표적인 서구의 신식 문물인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880년대 한국에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로 어진이나 기록화 등 도화서에서 담당했던 궁중 회화의 상당 부분은 회화가 아닌 사진으로 대체해 나갔다.
이는 사진이 새로운 미술의 장르로서가 아니라 극사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회화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차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1918년 제작된 '고종 어진']


1918년 제작된 '고종 어진'은 사진의 요소가 회화에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검은 통천관을 쓰고 붉은 강사포를 입은 채 옥좌에 앉아 있는 고종을 그린 초상화다. 전통 초상화와 달리 짙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으며 서양식 명암법이 두드러져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추측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대한황제 초상']


사진에 채색을 한 '대한황제 초상' 작품도 전시됐다. 이 작품은 피나무로 제작된 사진 보관용 상자에 넣어서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이 황룡포를 입고 일본식 자수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얼굴을 제외한 황룡포, 병풍, 카펫 등에 옅게 채색이 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은호의 '순종 황제 인물상']


김은호가 그린 '순종 황제 인물상'은 대한제국 황제의 계급이 대원수에서 육군대장으로 낮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조선 황실 촉탁 사진사였던 이와타 카나에가 1909년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순종 소매의 '人'자 표식이 11줄에서 9줄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각지 언론에서 대한제국이 어떤 이미지로 기사화됐는가 또한 살펴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프랑스 한 언론의 '조선인의 잔혹한 피의 처형']


프랑스의 한 언론은 '조선인의 잔혹한 피의 처형'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보고 그린 수채화를 실었다.
사진은 일본군 헌병들이 군용 철도 방해죄로 마포 공덕리에서 의병들을 잡아 죽이는 장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장면이 실린 이탈리아의 신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장면도 이탈리아의 신문에 실렸다. 이 주간 화보는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그려져, 안중근 의사는 뒤편에 조그마하게 그려져 있다.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

3부에서는 고종과 순종 시기의 각종 공예품의 전반적인 양상과 변화를 조명한다.
당시 궁중에 서양 식기가 보급되면서 조선의 공예가 쇠퇴일로에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 공예의 복구와 진흥을 위해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으로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됐다.
그렇지만 자금난으로 1911년 운영주체가 바뀌고 명칭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됐다
이 시기에 공예는 미술품, 미술공예품으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실용 기물이 아닌 감상용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규진의 '자수매화병풍']


김규진의 그림과 글씨를 바탕으로 완성한 12폭 '자수매화병풍'은 현대적 구도를 차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작품은 장대하게 뻗은 매화나무에 두 마리의 학이 노니는 모습이다. 그림 속 매화나무의 상단과 하단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당대 화단의 유행을 반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사층삼각탁자']


'사층삼각탁자'의 경우 아래쪽은 현대식 가구의 모습을 보이고 위쪽은 전통 사방탁자의 변형을 한 독특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는 당시 일본이나 서양 가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개화기에만 제작됐다.

한성미술품제작소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한 것도 눈에 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흑칠금상감작'(왼쪽)과 '은제도철문작']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흑칠금상감작'은 중국 고대 청동기를 모방한 술잔이고,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은제도철문작'은 한성에서 만든 것보다 크기가 축소돼있고 기능적으로 본래의 용도인 의례용 술잔이 아니라 향로로 사용됐다.

나전칠기는 1920년 이후 나전을 오릴 때 실톱을 사용하면서 그 양식이 크게 변해갔다. 정교하게 나전을 오릴 수 있게 되면서 나전칠기는 장식적으로 변해 관광상품이나 선물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진갑의 '도태나전칠기화병']


'도태나전칠기화병'은 이왕직미술제작소의 직공 출신인 김진갑의 작품으로 나전으로 된 공작과 모란꽃이 청자 위에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봉룡의 '와태나전봉황무궁화당초문화병']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작품인 김봉룡의 '와태나전봉황무궁화당초문화병'도 전시 됐다. 작품은 흑칠한 도자 위에 봉황, 당초, 무궁화 등 곡선미를 강조한 문양을 정교하게 오려낸 나전으로 가득 시문했다. 받침대까지 용과 모란을 나전으로 장식해 실제 화병으로서의 기능성보다는 전람회 출품과 감상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작품이다.

▶4부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로서의 화가'

1894년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서가 해체되고 외부의 화가들이 궁중회화의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전문가로, 혹은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익명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궁중회화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화원들과 달리 작가의식을 토대로 더욱 창작적인 차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이들이 궁중회화를 제작하며 보다 실력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명성을 쌓으며 기성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근대 회화에 있어 대한제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서화미술회와 서화연구회에서 양성된 화가들은 이후 근대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이한복의 '어해노안도']


서화미술회 출신 이한복이 그린 '어해노안도'는 쏘가리와 게, 그리고 기러기를 그린 길상도이다. 남성의 입신양명을 기원한 것으로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재건사업의 목적으로 그려졌다는 의견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은호의 '신선도']


김은호 또한 서화미술회 출신의 화가로 그의 '신선도'는 신선의 도상과 표현법이 근대 도석인물화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신선도'는 제1폭의 황초평과 종리권부터 제12폭의 이철괴와 한상자까지 인기있는 도교 선인들이 거의 망라돼있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채용신의 '십장생도'를 설명하고 있다.]


채용신의 '십장생도'는 고려에 이어 조선까지 내려오던 십장생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해·달·구름·산·물·돌·소나무·대나무·영지·청도복숭아 등으로 그려졌던 과거와 달리 철쭉·파초·공작·원앙·원숭이·기러기 등이 그려졌고, 경물을 서양 원근법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채용신의 '벌목도']


채용신의 다른 작품인 '벌목도'에서는 서양 화법을 적용한 다수 사례들이 확인된다. 화면의 네 모서리에 그려진 격자형 문의는 벌목 광경을 마치 건물 안에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배경의 계곡은 원근법과 서양식 선염법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규진의 '묵죽도']


서화연구회 출신 김규진의 '묵죽도' 또한 기존과 다른 화풍을 선보여 흥미롭다.
작품은 대나무의 상단과 하단을 생략하고 줄기 부분만을 확대해서 그려 강한 구도를 보여준다. 또한 꼿꼿하고 대담한 통죽과 부드럽고 유연한 세죽을 먹의 농담과 번짐, 퍼짐을 적절히 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영친왕 이은의 '영친왕유년시서화' 중 손 그림]


영친왕 이은이 어린 시절에 그린 18장의 그림이 수록된 '영친왕유년시서화'도 전시됐다. 이 그림은 영친왕이 일본에 강제 체류했던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배경묘사 없이 단색으로 그린 과일, 채소, 꽃, 모자, 손, 동물 등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일본 문부성에서 발행한 고등소학용 미술 교과서를 임모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김영기의 '우리동네']


김영기가 그린 '우리동네'에서는 한국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사진관과 그 당시 상업화랑이었던 고금서화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규진의 아들인 김영기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수묵채색화가로 그의 작품에는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이 자리 잡고 있는 일대가 그려져 있다.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설립을 선포했던 원구단과 황궁우, 천연당사진관 등이 담겼다. 이 작품에서 김영기는 활달한 먹의 필치와 여백의 효과를 살린 자신의 통상적인 화풍과 달리 꼼꼼한 붓질로 건물을 그린 뒤 제발을 통해 자세한 설명까지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초대형 미디어아트 작품]


전시장 맨 마지막에는 창덕궁 부벽화를 주제로 전시장 삼면을 꽉 채운 초대형 미디어아트 작품이 설치됐다.
15분 30초짜리 3채널 비디오작품에는 마지막 궁중회화로 창덕궁의 부벽화(비단에 그린 그림을 종이에 배접하여 벽에 붙이는 그림)인 삼선관파도, 조일선관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총석청절경도, 백화도, 봉황도 등 6점을 이미지화했다. 마지막 궁중회화를 빛으로 발산하는 개념으로 빛을 따라서 창덕궁 부벽화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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