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은의 손에 잡히는 부동산] 첫사랑을 못잊는 부동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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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은 기자
입력 2018-11-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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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건설부동산부 윤지은 기자]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76m²가 9월 초만 해도 19억원을 호가했는데, 9·13 대책 터지고 나서 지금은 17억원을 부르는 사람도 나와요."

"그래도 매수 대기자들은 만족 못 해요. 16억원까진 호가가 떨어져야 살 생각 있다고들 하던데요."


9·13 부동산 대책 이후 주택시장은 언제 폭등했었냐는 듯 줄곧 약보합세를 보이고 있다. 강남권의 경우 재건축 단지가 밀집한 강남4구(강남·서초·송파·강동)가 하락세를 주도하며 강북권보다 큰 낙폭을 나타냈다. 오름폭이 가팔랐던 만큼 추락도 많이 한 셈이다.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대책 직전까지만 해도 당장 사들이지 않으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추격매수에 열을 올리던 매수 대기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이런 현상은 어쩐지 기묘하다. 재화의 가격이 오르면 매수세가 주춤하고 떨어지면 수요가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쏭달쏭한 소비심리는 부동산이 가진 고관여적 특성으로 미뤄보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다. 명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제품이 비싸면 비쌀수록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해 기꺼이 지갑을 열지 않나. 비싸지만 사서 가지고 있다 보면 희소해져 되팔 때 가격이 매입할 때보다 오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과시욕이나 허영심을 충족해준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매수욕구가 불타오른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베블런 효과'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기자는 사실 베블런 효과보단 '의존 효과'를 더 믿는 편이다. 의존 효과란 재화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스스로의 자주적 욕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광고·선전 등에 의해 이뤄지는 현상을 뜻한다. 기자들이 '은마아파트 호가가 2억원 떨어졌다'는 제목의 기사를 많이 쓰면 쓸수록 수요자들의 매수심리는 떨어진다. 실거래가 변동이 크지 않고 일부만 호가를 내린다는 '팩트'는 그리 중요치 않다. 강남 일대 공인중개업소 대표들이 시장 상황을 엿보려는 기자들의 방문에 손사래를 치는 이유도 '언론 마사지'에 좌우되는 매수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 아닐까.

매수자들만 비합리적 행동을 보이는 건 아니다. "하락장이 분명하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중론인데도 집주인들은 호가를 '미친듯이' 떨어뜨리진 않는다(올릴 때는 미친듯이 올렸다). 일부는 호가를 되려 올리기도 한다.

마음이 급하지 않아서, 혹은 그동안 숱하게 부침을 겪은 부동산 시장을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집주인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너무도 많다. 9.13 대책 이후 급격히 오른 보유세, 금리 인상 우려 등 대내외적 변수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집 사기가 고민스러워 전세로 주저앉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전문가들도 쉬이 예단하지 못하는 '부동산 시장의 내일'을 집주인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분명 다주택자 중 '똥줄'이 타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유는 매입가격 아래로는 결단코 매도하지 않겠다는, 최소한 본전은 찾겠다는 욕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매몰 비용을 놓지 못하면 적절한 매도 타이밍을 놓쳐 수년 간 떨어지는 낙엽만 붙들고 있게 될지 모르는데도.

얼마 전 찾은 모 공인중개업소 대표는 "집이 이렇게 안 나가는데도 집주인들이 호가를 내리지 않는 게 의아하다"는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기자님은 첫사랑을 빨리 잊으셨어요? 집 가진 사람들도 똑같아요. 자기가 사랑에 빠졌던 그 가격을 못 잊는 거야. 첫사랑은 저만치 멀어져가는데 차마 잊지를 못해서 버티고 있는 거라고요."

뜻밖의 철학적인 말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어째서 부동산 가격은 오를 땐 가파른데 떨어질 땐 완만한 건지 그제야 알았다.

사랑에 빠지는 덴 3초면 충분하다지만 잊는 덴 평생이 걸린다지 않나. 부동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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