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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문희상 국회의장이 국회 한복판서 가을사랑을 외치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8-11-01 14:54수정 : 2018-11-01 15:33
[시를잊은그대에게]빈섬 이상국, 시월의 마지막밤에 '국회 시낭송무대' 속에 빠져들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도종환(문화부장관.시인)의 '가을사랑' 중에서


정치가 문희상의 강직하고 털털한 인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섰던 국회의장은, 갑자기 춘치자명(春雉自鳴, 봄날 꿩이 제 흥에 겨워 울듯)처럼 저 시를 읊었다. 도종환의 시가 담고 있는 여성같은 부드러움과 깊은 내성에서 우러난 고요함 같은 것이, 문의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지만, 그가 시를 낭송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문희상은 열 몇 살 시절의 문학소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이란 대목에서는 스스로의 생의 어떤 대목이 생각나기라도 한듯 온전히 그 시행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시와 정치가 한 자리에 있는 시간. 2018년 10월31일. 우리가 오랫동안 '슬픈 사랑의 명절'처럼 여겨온, 그 시월의 마지막밤.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은 정치 속에서 시의 여백을 찾는 시간이기도 했고, 시 속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행간이기도 했다. 올들어 벌써 16회나 된 '국회 시낭송의 밤'에는 많은 정치인들과 문화인들이 참석했다. 꽤 넓은 객석을 꽉 메운 '문시객(聞詩客)'들 중에도 시인들이 보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도종환 시인이 객석 앞 자리에 줄곧 앉아 있었고, 추미애, 서영교, 박찬대(이상 민주당), 이은재(한국당), 김삼화(바른미래당), 최경환(민주평화당) 의원이 평소의 정치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앉아 깊어가는 가을밤을 누리고 있었다. 
 

[2018년 10월31일밤 '국회 시낭송의 밤' 의원회관 대회의실을 꽉 메운 방청객들. ]



문의장은 시와 정치를 나름으로 이렇게 풀었다. 남북 두 정상이 유행어로 만든 '봄이 온다'와 '가을이 왔다'를 정치가 정치를 서로 잇는 두 개의 시행(詩行)으로 읽었다. 그렇게 보자면 한반도 평화를 열어가는 과정들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일 수 있지 않을까.

국회의장의 이런 센스는, 사실 많은 정치가나 문학가들이 생각했던 화두의 하나였다. 국가 지도자는 시인 정치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플라톤까지 갈 것도 없다. 1960년대 세계적인 시학 이론을 세운 C. M. 바우라(영국 옥스포드대 교수)는 그의 책 '시와 정치'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심훈을 얘기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는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땅덩어리인지도 잘 모를 때였다.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이야 말로,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고 평한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이까                    심훈의 '그날이 오면' 중에서

심훈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문예의 길이란 가시밭을 맨발로 밟고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난한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한 십년 하고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노력과 과 수련을 쌓는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제일보를 내어디딜 수가 있을 것이다...어줍지 않은 사회봉사, 입에 발린 자기희생, 그리고 그 어떤 주의(이념)의 노예가 되기 전에 맨먼저 너 자신을 응시하여라."

                             심훈의 '필경사잡기' 중에서

가을밤, 정치인들의 시읽기가 이런 심오하고 비장한 '시와 정치'의 접점을 의식했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날 분위기에는 정치의 논리와 속셈이 풀지 못하는 '대승적인 문제들'을 시가 지닌 직관과 진정성이 풀어나갈 수 있다는 각성같은 것은 느끼고 가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이날 객석에 앉아 문희상의장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시낭송을 들었던 귀에는, 정치인의 내면을 흐르는 '인간적인 내재율'이 살풋이나마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국회 한복판에서 도종환의 시 '가을사랑'을 외치는 국회의장의 낭만주의에 귀를 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날 김문중, 이근배, 이경, 박준영, 김종 시인이 참석해 자작시를 읽어주었다. 또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숨어서 일을 하는 문화계 사람들도 많았다. 김태웅 한국문화연합회장,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 그리고 허드렛일을 도맡은 무용가 오은명 선생의 뛰어난 기획이 빛을 발휘한 무대였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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