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 타계]'불가능'이라 불리던 문학스승…김현과 쌍벽이룬 황금시대, 모두 잃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8-10-26 19:19
#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를 울게 한, '문학 창공의 별'

"가끔, 길을 가다가, 뜬금없이 자문하곤 한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심야에 또는 새벽에 글을 쓰다가, 물끄러미 앉아 중얼거리곤 한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이 절체절명의 질문에 '문학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고백하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를 울게 하며, 그리하여 나를 금강석처럼 투명하고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한국문학의 거목 김윤식이다." 

소설가 함정임은 10여년전 한 언론 칼럼에서 김윤식의 한 에세이집('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에 대해 "저 암흑의 1980년에 대학생활을 한 내가 가야하고 또 갈 수 있는 길을 비추어주던 창공의 별들로 이루어진 성채"라면서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 또 가버린 길 앞에서 아득해하는 영혼들에게 심장처럼 떼어주고 싶은 책"이라고 인상적인 독후감을 남기면서 김윤식과의 심원한 문학적 인연을 드러냈다. 

2018년 10월26일 문학가 김윤식 교수(서울대, 82세)가 별세한 뒤 뜻밖에 그의 삶의 궤적과 학문의 행적을 살피는 언론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비좁아지는 문학의 입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김윤식 교수의 대중적 인지가 함정임이 보여준 문학계 내부의 열광에 비해 온도차가 컸기 때문일까.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김윤식 저, 문학사상사)의 표지.]



# 김윤식 선생의 부음은 쓸쓸한 암전(暗轉) 같았다 

1973년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라는 첫 책을 시작으로 250여권의 책을 낸 김교수의 연구범위는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여, 국문학 마을에서 김윤식의 땅을 밟지 않고 논문의 삽 하나 꽂기 어렵다는 우스개가 나올 판이었다.

그의 연구는 일제 때의 좌익단체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다루면서 정치적으로 예민한 영역을 파고들었다. 그 결과로 카프 계열의 임화와 백철의 작가론을 펼쳤고, 이광수와 염상섭 연구도 성과를 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열정적인 소설 비평작업을 펼쳤다. 소설가 이승우는 "그가 읽지 않은 소설은 아직 쓰이지 않은 것 뿐"이라고, 그의 성실한 독서를 예찬한다. 한국에서 출간되는 중단편은 빼놓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작가와 작가를 연결하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여 문학이라는 천체를 환하게 꿰는 안목으로 작가(예를 들어 소설가 김연수)를 탄복시키기도 했다.  또 미학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하여 예술 분야의 비평에도 자기 영역을 개척했다. 

김윤식의 인간적 매력에 대해 생생하게 돋을새겨놓은 사람은 천정환 교수(성균관대)일 것이다. 2013년의 글이다. 발랄한 문장이라 인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 독설을 들으며 강의실에 앉아있던 때가 그립다

"학부 때부터 김윤식선생님의 수업을 몇 학기 들었다.(......) 수업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 미남에 옷도 잘 입었고) 특히 유명한 것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독설이었다. 그는 종종 수강생들과 국문과 학생들에게 "무식한", "쓰레기 같은", "너절한" 같은 폭언(?)을 선사했다. 그것들은 그의 어떤 본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 경남지방 남자의 무뚝뚝함을 원료로 하고 또 그것과는 별도로 어딘가에 깊이 박혀 존재하는 예민한 자의식이 버무려진, 그리고 다시 이렇게 가능한 타인의 어설픈 짐작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짧고 강한 표현들이었을 것이었다. "제대로 된 집안의 자식이 인문학을 할 리 없다"든가 "문학 나부랭이"같은 말은 문학 따위에 관심 갖는 학생들에게 김윤식이 해주는 '일반 선물' 쪽에 속했다 할 수 있고, 아직 미숙한 국문학 전공자들을 위한 맵고도 둔중하여 충격적인 조언이나 비평은 늘 또 따로 있었다.(......) 당연히, 그런 독설들을 들으며 강의실에 앉아있던 때가 가끔 그립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들을만한 사람한테 욕설을 들을 때 유발되는 매저키즘적 쾌감과 연관되며, 다른 한편 그런 모멸적인 언어를 통해 "문학 나부랭이" 따위에 목을 맬 자로서의 자의식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생성된 상황에 대한 회감이기도 하다."

천교수의 이 글에는, 대학시절 내가 늘 양립하는 두 산처럼 여겼던 김현과의 '라이벌 의식'에 대한 얘기들이 등장한다. 나는 적어도, 김윤식 선생을 돌아보는 자리엔 이 메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김현 문학전집 '행복한 책읽기'에서 김윤식을 매몰차게 비판했던 대목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들이다.

#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 들어있는 김윤식론의 충격

[김현의 비판]김윤식의 '우리 문학의 안과 바깥'(1986,성문각)에는 예전에 표명한 태도들이 거칠게 되풀이 되고 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 대한 회고담이 제일 진솔하고 읽을만하다. 그의 내면의 무의식은 작가와 세계가 부딪치는 자리에 있지, 그 앞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문체를 이상하게 과잉-서정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그의 실증주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다. 

김윤식의 '우리 소설과의 만남'(1986, 민음사)을 공들여 읽다. 그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자기 직관에 그가 유보없이 매달릴 때이며, 그가 가장 어설픈 대목은 원론에 집착할 때이다. 원론을 지탱하고 있는 원칙들의 의미는 설명하지 않고 실증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할 때 원론들은 그 관여성을 잃기 쉬운데, 그의 경우가 때로 그러하다. 남의 이론을 공들여 읽지 않고 몇 개의 이론적 개념들만을 감각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 이론은 휘청댄다.

"<삼대>란 무엇인가. 조선일보(1931년)에 215회 연재된 연재소설이다" 식의 늘리기는 이제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늘리기는 수수께끼의 묘미인 놀라움이 없기 때문에 진부하고 지겹다.


함께 공저를 내기도 했던 동지로서, 표현방식의 썰렁함을 문제삼아 '진부하고 지겹다'는 감정적 진술까지 생략하지 않고 있는 이 글들을 읽고 김윤식 선생도 무감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저 김현의 저 독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김윤식'으로 타자화하면서 말이다.

[김윤식의 반론]김윤식의 글에 대한 저러한 비판이란, 또는 16사단 육군중위인 형과 함께 지낸 염상섭의 중학시절 하숙집을 찾아 두 번씩이나 교토를 방문하고 쓰여진 <염상섭 연구>에 대한 비판이란, 역설적으로 말해 김현 자신에 대한 애증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만년에 이르기까지 김현의 한국문학사의 총체적 파악에 대한 욕망은 얼마나 강하고 집요했던가. 혹 그것에 대한, 욕망의 좌절에 대한 회한과 원망의 표출을 김윤식을 통해 분출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는 '실증주의적 정신'과 '실존적 정신분석'의 행복한 만남으로 이루어졌던 공저 <한국문학사> 이래 어긋나기 시작하여 그 후 계속 서로 멀어져 갔음에 대한 자책감이랄까.(......)

김윤식의 글쓰기가 "그의 실증주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는 것, 또 "원칙들의 의미는 설명하지 않고 실증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한다든가, "열정이란 재능을 가리킴"이라는 말에 주목, 그 '열정=재능'이 김윤식에겐 없다는 것, "그의 내면의 무의식은 작가와 세계가 부딪치는 자리에 있어 그 앞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문체를 이상하게 과잉-서정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며 그의 실증주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 했고, "그의 늘리기는 수수께끼의 놀라움이 없기 때문에 진부하고 지겹다"라고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진부하고 지겹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윤식이 진부하고 지겨운 것은 곧, 한국문학사가 진부하고 지겹다는 것. 그동안 진짜 문학인 듯 가면을 써온 한국문학사에 대한 가면을 이제 벗겠다는 것.

# '진부하고 지겹다'는 염상섭 이해 부족에 대한, 김현의 자기짜증?


김윤식이 내놓은 반론의 요지는, 그의 날것의 비난은 김현 자신에 대한 애증의 표시였으며 한국문학사에 대한 파악 욕망이 좌절되자 그것을 김윤식에게 분출했다는 것이다. 뒤의 말에서는 자신을 욕한 것들을 다시 꺼내와 열거하면서, 나를 진부하고 지겹다고 한 것은 가면을 쓴 한국문학사가 지겹다는 의미라고 해석을 한다. 이 반론은 한국어로 된 언어들이 어떤 식으로 날을 세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 

김윤식의 의견에 따르면, 김현은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그것을 김윤식을 비판하는 맥락 속에다 넣었다는 얘기다. 왜 짜증이 났느냐 하면 한국문학사를 파악하다 보니 그것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애증(연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지친 마음)'이 커져, 그것을 김윤식에게 투사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현의 짜증은 한국문학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제껏 숨겨왔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진부하고 지겹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물론 이런 풀이들은 김현이 살아와 다시 읽는다면 더 신랄한 반응이 나올지도 모른다.

# 한국문학사의 기적인 김현을 지켜본 것이 나의 기적

우선 내가 옆에서 보더라도, '진부하고 지겹다' 앞에 있는 말들을 김윤식 선생이 냉정하게 읽지 않았을 가능성을 느낀다. 김현의 '진부함과 지겨움'은, '그의 늘리기는 수수께끼의 놀라움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도출되는 감정이다. 

"<삼대>란 무엇인가. 조선일보(1931년년)에 215회 연재된 연재소설이다."라는 말은 "<삼대>는 조선일보(1931년)에 215회 연재된 연재소설이다"로 그냥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문답의 수수께끼 형식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 수수께끼가 전혀 놀라운 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라, 김현처럼 까칠한 눈으로 읽는 사람에겐 진부하고 지겹게 느껴졌다는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 20세기 문학연구 두 별의 보기드문 장면

표면적으로 이 문장의 진부함 때문에 발생한 단순한 지겨움으로 읽어야할 자리에서 굳이 '한국문학사에 대한 지겨움'이 전이된 것으로 읽는 것은, 김윤식이 여러 가지를 헤아린 독법일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 연구에 대한 불문학자 김현의 '역부족'을 드러낸 것이라고 받아친 것이다.

김윤식의 실증주의가 작가와 세계가 부딪치는 맥락이나 전후를 읽지 못하는 열정없음=재능없음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는 신랄한 비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해 대응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김현 자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라는 말로 되돌려줬다. 물론 김현의 까칠한 비판이 어디에서 왔는지 제대로 석명될 기회는 잃었지만, 이 논변에는 20세기 문학사상을 파고든 두 학자의 자존심과 신념 사이의 보기 드문 샅바다툼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치열한 언어들의 경합···이야 말로, 두 사람의 삶이 한 자리에서 드러난 멋진 뷰포인트가 아닐까. 

김윤식은 이후 김현을 '한국문학사의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김현을 지척에서 지켜본 것이 '자신의 기적'이라며, 겸손 속에서도 스스로를 한국문학사의 기적대열에 합류시켰다. 

# 문학사도들에게 김윤식은 총체적으로 '불가능'이다

다시 김윤식의 정년 기념 강연자리에 있었던 천교수의 멋진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김윤식-한국문학사의 그늘은 크고 깊어 벗어나기 어렵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의 직계 제자 중에 그보다 더 부지런하고 더 강한 정신을 갖고 그보다 더 많이 읽고 쓰는 자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보다 더 강렬한 나르시시즘을 갖기란 이 시대에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그는 총체적으로 '불가능'이다."

우린, 우리 시대의 소설을 가장 치열하게 읽어내고 풀어내던 '불가능한 정신'을 지금 보내고 있는 중이다. 열정이 사라지는 10월의 주말저녁이 더 춥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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