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⑪] ‘사인방’ 장칭의 교조주의 모범영화 ‘홍색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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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2018-07-0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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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셰진 감독 영화, 춤극으로 제작

  • 국가 권력에 의해 사라진 상상력·창의력

장칭(왼쪽)과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 [사진=바이두]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영화도 예외 없이 그 이념과 스타일을 따라야 했다.

1949년부터 1966년까지 이른바 ‘17년 시기’에는 사회주의를 영화로 재현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잇달았다.

상하이의 고아 이야기를 다룬 ‘싼마오 유랑기(三毛流浪記)’, 상하이(上海) 사람들과 국민당원의 투쟁을 그린 ‘까마귀와 참새(烏鴉與麻雀)’, 혁명에 투신한 여성 지식인 이야기 ‘청춘의 노래(靑春之歌)’, 이대문호 루쉰(魯迅)의 소설을 영화화한 ‘축복(祝福)’, 혁명에 실망을 느낀 청년의 삶을 그린 ‘이른 봄 2월(早春二月)’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영화들이었다.

그러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중국영화를 교조주의 속으로 밀어 넣었다. 1956년 ‘쌍백방침(雙百方針)’은 인민에게 발언과 비판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정책이었다.

온갖 꽃이 함께 피어난다는 ‘백화제방(百花齊放)’과 온갖 이론이 다퉈 소리를 낸다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비판이 도를 넘어서자 이듬해인 1957년 반(反)우파투쟁을 전개했고, 뒤이어 1958년에는 생산력을 높이자는 대약진운동을 한다.

대약진운동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던 마오쩌둥은 ‘해서의 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연극을 비판하면서 대대적인 극좌 운동을 기획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당시 국방부장이었던 린뱌오(林彪)와 ‘사인방’이 주도했다. 사인방은 린뱌오가 몰락한 뒤 1972년부터 권력을 잡았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과 선전·선동에 능했던 정치인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妖文元), 왕훙원(王洪文)이 그들이었다.

장칭은 1930년대 중국영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상하이에서 란핑(藍蘋)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여배우다.

당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장칭은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권력을 잡은 뒤 가장 먼저 영화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1949년 이후 사회주의 중국의 문예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른바 ‘문예흑선독재론(文藝黑線專政論)’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17년 동안의 문학과 예술은 모두 ‘검은 주류’가 지배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초월해야 하는 새로운 문학예술의 과제가 대두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근본과업론’이다. 그가 주장한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근본 과업이란 ‘노동자와 병사의 영웅 인물을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영웅 인물들은 ‘주자파(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일당)’와 투쟁하는 캐릭터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 장칭은 1967년 8종의 ‘모델’이 되는 공연예술을 지정한다. 이른바 모범극(樣板戱)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연들을 영화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모범영화(樣板電影)의 탄생이었다.

이 공연과 영화는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원의 전투, 노동자 태업 해결 과정, 한국전쟁에 참여한 무용담, 중·일전쟁에서 친일파 척결과 공훈을 세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현대 경극 5종, 춤극 2종, 교양음악 1종이었다.
 

셰진 감독의 영화 '홍색낭자군' 한 장면.[사진=바이두 ]


그중 1972년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은 셰진(謝晋) 감독이 1961년 같은 제목으로 연출한 영화를 춤극으로 만든 경우였다. 하이난다오(海南島)의 농노였던 우칭화(吳淸華)가 핍박에 굴하지 않고 혁명에 투신하여 결국 지주를 징벌한다는 내용이다.

장칭은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공연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공연이 결국 완성되고 나면 이를 다시 영화로 찍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칭은 ‘삼돌출’ 원칙을 제시했다. 삼돌출 원칙이란 공연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영웅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지침이었다.

즉, 모든 인물 가운데 긍정적인 인물을 부각한다. 또 긍정적인 인물 가운데 영웅 인물을 부각하고, 영웅 인물 가운데 주요한 영웅 인물을 부각한다는 원칙인 것이다. 그 중 ‘제1호’ 영웅 인물은 반드시 ‘고상하고(高)’, ‘완전하며(全)’, ‘위대해야(大)’ 했다.
 

장칭의 지도 하에 제작된 영화 '홍색낭자군'의 한 장면. [사진=바이두]


이런 원칙은 홍색낭자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무대 위에 여성 농노가 여럿 등장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회색 옷을 입힌 반면, 우칭화에게만 선명한 붉은 색 의상을 입히는 식이다.

지주에게는 아예 검은색 옷을 입게 해 홍색과 흑색의 대비를 분명히 했다. 또 카메라는 유독 우칭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그녀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한다.

교조주의에 함몰된 영화는 예술적 영감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당시 영화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공산당과 국가의 요구에 의존하는 양상만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 이야기만큼은 사회주의적 가치를 드높이는 데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 중국 사회에 복고주의가 불어 닥치자 같은 제목의 드라마와 영화가 다시 만들어진 것만 봐도 그렇다.

문화대혁명 시기 춤극 홍색낭자군은 셰진 감독이 연출했던 동명의 원작 영화를 퇴보시킨 졸작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권력에 의해 영화와 예술이 어떻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내팽개치고 판에 박힌 틀 속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가 하는 증거로서 장칭의 홍색낭자군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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