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⑮] 20년 모신 어른 이동녕의 죽음…슬픔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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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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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잇달아 지는 민족의 별들

[석오 이동녕의 장례식(1940.3.17 치장) 영정 들고 있는 이가 엄항섭, 그 오른쪽 옆으로 네번째가 수당이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일본군은 해안선을 따라 남진, 연해지역을 거의 다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點)과 그 점들을 잇는 선(線)을 차지했을 뿐, 면(面)은 중국 민중의 것이었다. 일본군 점령지역마다 중국인들의 치열한 항일유격전이 전개되었다. 중일전쟁이 만 2년째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기세는 둔화되기 시작했고,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군의 후퇴로를 좇아 바로 충칭으로 가지 않은 것은, 중국정부의 항일의지를 미심쩍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일본군과 어떤 타협이라도 이루어지면, 임정은 꼼짝없이 포로 신세다. 광둥에서 홍콩으로 빠져나가 베트남으로 가자는 의견도 나왔다. 물론, 가당찮은 착상이었다. 베트남에 가서 무슨 독립운동을 한단 말인가.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중국정부 내 부일세력의 우두머리인 왕징웨이(王精衛)와 허잉친(何應欽)이 일제와 손을 잡았다. 내전의 여진도 가시지 않았다. 장제스의 군대는 곳곳에서 공산당의 신사군(新四軍)과 팔로군(八路軍)을 공격했다. 대체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관동군은 만주와 몽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군과도 충돌했다(1939.5). 결과는 관동군의 참패. 대륙 석권을 앞두고 등 뒤가 불안했던 일제는, 자신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자(1939.8), 소문내지 않고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1941.4). 이 여파로 장제스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겼다. 대륙의 정세는 더 복잡해졌다.

# 임시정부의 군대는 언제 만들까…
임시정부가 쓰촨성 치장에 안착한 1939년 4월의 시점에서, 일본군은 동아시아를 석권했다. 다섯 달 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는 전쟁의 연옥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우리 힘만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게 힘들다면, 한시라도 빨리 참전국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군사작전으로 항일전에 기여해, 이를 바탕으로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 독립 이후를 대비해야 했다.
이 과제는 개인 자격으로 중국군이나 홍군에 입대해서 싸우는 것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한민족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남의 땅에서 병사를 모으고 군비를 걷는 게 마음대로 되나. 이 일은 중국정부의 동의와 전폭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미 약산 김원봉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명칭의 준군사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고민은 깊었다.
1939년 7월, 임시정부는 중국 내 항일민족운동단체 통합과 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노력을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임정의 기반이자 한국광복진선의 주축인 세 정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 산하단체 대표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이리하여 좌우파 합작으로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陳線協會)가 결성됐으나, 단일한 지휘계통의 군사조직을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해 11월,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꾸려졌다. 류저우에서 조직된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의 후신으로, 대장은 나월환(羅月煥)이었다. 조카 석동은 이번에도 최연소로 공작대원이 되었다. 동시에, 임시정부는 청사 조성환, 화강(火崗) 이준식(李俊植) 등을 군사특파단으로 시안(西安)에 파견했다. 병력 모집, 즉 초모(招募) 사업이 목표였는데, 안타깝게도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 어느덧 사십줄 중년이 되어
1940년이 되었다. 수당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이어 망명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어느덧 사십줄 중년이 된 수당은 이 무렵의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상해에서 시아버님을 모시던 일, 독립운동자금을 품에 감추고 가슴조이며 거룻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일, 일본군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상해를 빠져나와 치장(藄江, 기강)까지 허겁지겁 도망왔던 일, 그 20년은 숨어 산 20년이었고 쫓겨다닌 20년이었다. 그런데 손에 잡힌 것은 없다. 일찌감치 벗어버렸어야 할 식민지 국민이라는 오명도 내팽개치지를 못했다. 어찌 될 것인가? 어찌 할 것인가?”(<장강일기> p173)
성엄이 중국 관리를 하며 장시성에서 지낼 무렵이 떠올랐다. 그때도 수당은 마음이 천추만큼 무거웠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이렇게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조국이 해방되고 나면, 나는 무슨 면목으로 귀국할까…. 차라리 중국으로 건너오지 않고 고국에 남았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는 상념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임정 안살림에 매진했다.
 

[형무소 수감 당시 도산 안창호. 아주경제DB]

# 잇달아 지는 민족의 별들
쓰촨의 3월은 서울의 5월을 빼닮았다. 수당은 아이들과 나물을 캐고, 저녁에 국수 한 그릇씩 돌린 다음, 다음날 아침식사를 차려 석오의 거처를 찾았다. 아침식사라고 해야 반숙 계란 두 알. 그런데 석오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중국인 의사가 와서 진맥을 하더니, 노환이라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수당들이 극진하게 병구완을 했지만,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은 곡기를 끊은 채 열흘 만에 눈을 감았다. 늙은 애국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쓸쓸하기 한량없었다. 석오는 수당이 20년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모셨던 분. 해방도 못 보고 가시다니. 수당은 가슴을 쳤다. 석오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3당만이라도 합당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를 받들어 통합 한국독립당이 창당, 백범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직도 승계했다.
 

[1940년 4월26일 충칭에서 치러진 백범 모친 곽낙원 여사 장례식.왼쪽 앞부터 손자 김인, 김신.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석오보다 2년 앞서, 임시정부가 창사에 머무를 때 국내에서 도산이 숨을 거두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임시정부의 산파이자 기둥이었던 도산. 백범과는 노선을 달리 했지만, 수당이 진정으로 존경했던 어른. 도산의 추모행사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던지 곁에 있다가 덩달아 울었다며, 김자동 회장은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석오가 가고 한 달 뒤,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임정 청사는 치장에 있었으나, 백범, 남파, 일파 등은 중국정부와 교섭을 위해 충칭에 따로 연락사무소를 두고 생활했다. 백범은 모친을 충칭에서 모셨다. 연이은 비보(悲報). 잇달아 지는 민족의 별들. 독립은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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