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②] 예쁘고 총명했던 스물한살 며느리, 상하이로 떠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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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창우 기자
입력 2018-03-2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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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차칸서 꼬박 일주일… 일제 끄나풀 친척오빠 출국 도와

[그래픽=김효곤 기자]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2>

경의선. 왜놈들이 놓은 철로다. 무심한 듯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수당은 나라의 운명을 생각했다. 대한제국은 분명 사대(事大)에 종지부를 찍는 표상이었다. 그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망국이었다. 자력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면, 열강의 각축을 이용할 수는 없었을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독립과 왕조가 남긴 적폐의 청산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였다. 차별과 수탈을 그대로 둔 채 자강(自强)이 가능할 리 없다. 그게 외국에서 신식무기를 사온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언제나 그렇듯, 고춧가루를 뿌리는 자들은 내부에 있다. 만일 독립이 기득권을 쓸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완용은 혼자가 아니었다.
외세의 개입 없이 왕조가 문을 닫았던들, 논과 밭은 농민의 것이 되었을 게다. 갑오농민전쟁이 요구했던 게 그것이다. 헌데, 맹랑하게도, 5백년간 농민의 등골을 빼먹던 봉건지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게 바로 친일파의 뿌리다. 가산을 독립전선에 바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우당(友堂) 이회영(李會英) 그리고 대한제국의 고관 자리를 뿌리친 수당의 친정과 시댁은 존재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우리 근대사의 경이 가운데 하나였다.

# 상해 프랑스조계 패륵로 영경방 10호
열차가 의주에 닿았다. 국경인 압록강철교를 건너자면 여행증명서가 필요했다. 친척 오빠뻘 되는 정필화가 손을 써서 구해왔다. 그는 일제 끄나풀 노릇을 하던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누이동생을 도왔다. 수당은 봉천역에서 다시 기차에 올랐다. 산해관, 천진, 남경을 거쳐, 꼬박 일주일을 열차 안에서 보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낯선 중국말. 며칠 지나자, 그 소리조차 정겹게 들리는 것이었다. 대륙은 넓었다. 귀를 기울이니, 열차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말씨도 천양지차로 변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끝없는 평원. 이 풍요로운 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수당은 조국의 산천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시댁에서 나온 지 보름. 드디어 상해에 도착했다. 무작정 조선사람들이 사는 집을 물어, 찾아간 곳이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손 목사는 의정원 의장을 지낸 임정 요인으로, 해방 후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이다. 그의 인도로 마침내 상면한 시아버지와 남편. 시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상해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영경방(永慶坊) 10호. 큰길가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안으로 쑥 들어간 그곳. 방 셋에 부엌이 딸려 있던 이층집. 수당은 시아버지가 계시던 그 집의 주소를 평생 잊지 않았다. 집 전체를 월세로 빌렸는데, 부자가 방을 하나씩 쓰고, 방 하나는 다시 세를 놓았다. 2년 뒤에는, 백범 김구 일가와 최중호(崔重鎬)가 이 집에서 살게 된다.

# 와이탄(外灘)의 공기
프랑스조계는 치외법권지대로 왜경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비록 재정난으로 열 번 넘게 이사를 가야 했으나, 임시정부도 그곳에 있었다. 수당의 눈에 비친 시아버지와 남편의 상해 생활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애옥살이”였다. 빠우판(包飯)이라 부르는, 중국식 배달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수당은 시아버지를 조석으로 봉양했다. 소찬이지만, 머나먼 망명지에서 며느리가 정성껏 차려 올리는 밥상이었다.
수당의 일상이 바뀌었다. 살림을 챙겨야 하는 건 여전했지만, 임정 요인들은 그를 동농 김가진의 자부(子婦)이자 한 사람의 독립지사로 대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신문명의 중심이었던 상해는 경성과 너무나 달랐다. 항상 긴장되고 활기찬 분위기. 어쩌면 수당은 황푸강(黃浦江) 와이탄(外灘)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 역시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들려주고 상의했다. 이미 임시정부의 일원이 된 수당으로서도 알고 지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눈 감고 3년, 귀 막고 3년, 입 닫고 3년. 상해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신여성 행세를 한 건 아니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수당은 친정아버지가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유학을 권했을 때 시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이 방문할 때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인사시켰고, 수당은 그분들을 뇌리에 새기며 예의범절을 다했다. 내무총장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와 법무총장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이 도움을 많이 주었다. 도산이야말로 임시정부의 진정한 산파였다.
“상해로 오기 전 국내에서는 3․1운동의 기운에 힘입어 상해임시정부에 걸고 있는 기대가 컸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획기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는데, 막상 상해에 직접 와서 보고 듣고 알게 된 임시정부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였다. …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각자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씀이 아니었다.” (<장강일기> p55)

 

[그래픽=임이슬 기자]


# “부인, 지금 국내는 死地나 다름없는데…”
한성, 노령(蘆嶺), 상해로 나뉘어 있던 세 갈래 임시정부가 안창호의 노력으로 하나로 뭉친 게 1919년 9월이고, 수당이 도착한 게 1920년 1월말이다.
그 사이 임시정부의 기세는 사뭇 꺾여 있었다. 상해에 온 지 달포만에, 그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하루하루 연명하다시피 명맥을 유지하는 시아버지와 임시정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수당이 찾아와 고국에 돌아가 돈을 변통해 오겠다는 뜻을 밝히자, 예관은 놀랐다. “부인, 지금 국내는 사지(死地)나 다름없는데….” 그랬다. 시아버지와 남편에 자신까지 망명하고, 큰오빠가 대동단으로 체포됐다. 왜경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시댁과 친정을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이의 뜻은 굳었다.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랴.
고육지책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어려웠으면, 안 된다고 딱 부러지게 막지도 못하는 예관의 태도가 수당의 마음을 더 미어지게 했다. 예관은 그이의 결의를 알게 된 후, 자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달라고 요청했다. 임정의 밀사로 국내에 잠입해 자금을 조달하라. 그것이 수당 정정화가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첫 번째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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