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여자의병장 윤희순④]춘천의 잔다르크, 곡기를 끊고 기록을 남기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3-14 15:0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아들의 참혹한 죽음에 울부짖은 어머니...75세로 장렬한 생을 마감

# 여자들 밖에 없는 마을을 불태운 일제

무순 함락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튿날부터 일제는3000명이 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량학살했다. 참담한 결과였다. 희순은 눈물을 머금으며 봉성현 석성으로 주소를 옮겼다.

이국만리 이내 신세 슬프도다 슬프도다
어느 때나 고향 가서 옛말하고 살아볼꼬
방울방울 눈물이라 맺히나니 한이로다

                      윤희순 <신세타령> 중에서

석성에서 윤희순은 둘째 손자(유돈상의 둘째 아들)를 보았다. 기쁨도 잠시. 1934년 첩첩산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을 앞에서 소리쳤다. “모두 나와라. 반드시 나와야 한다. 사흘을 기다리겠다. 안 나오면 집을 모두 태워 버리겠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마을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하고 여자들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윤희순은 <일성록>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불길 속에서 애 울음소리가 들려서
정신없이 포대기째 안고 나와보니
포대기도 아이도 모두 뜨겁더라

이 화재 속에서도 희순은 돈상의 갓난아이 연익과 둘째 아들 교상의 딸 영희를 구해냈다. 이 장면을 보노라면 희순이 시집오던 날의 화재가 떠오른다. 운명은 이렇게 복선을 깔고 사람을 시험하는 것일까.
 

[사진 = 윤희순이 친필로 써서 남긴 '안사람 의병가']



# 아들 유돈상 무순감옥서 고문에 시달리다 참혹하게 순국

이듬해 6월 13일 유돈상이 처갓집에 머물러 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무순감옥에서 한 달간 고문에 시달리던 그는 7월 19일 숨을 거뒀다. 감옥 밖으로 내던져진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칼에 찔린 자국 천지였다고 한다. 아들의 시신 앞에서 희순은 부르짖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는 만리타국에서 누굴 의지하고 살며
연직이와 연익이 이 어린 것을 누구에게 맡기오리까.”

며느리도 울부짖었다.

“어머니, 만날 나가서 독립운동 하려고 하시더니
이 꼴을 보려고 그러셨습니까.
좋은 세상은 더욱 멀어지고 갈수록 험렬하니
독립운동이 사람만 죽인 꼴이니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절망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떴다. 아들 유돈상과 며느리의 죽음에 말을 잃은 희순은 곡기를 끊었다. 아들이 숨진 지 열 하루째 되던 날 침묵 속에서 붓을 떨며 집필하던 <일성록>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매사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윤희순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다.

# 독립투사 남자현보다 12살 많은 윤희순

윤희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독립투사 ‘여자 안중근’ 남자현과 자꾸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윤희순은 1860년생이고 남자현은 1872년생이다. 열 두 살 차이가 나는 두 조선 여인은 나라가 무너지는 절망 속에서 강렬한 삶을 살다 갔다.

윤희순의 경우는, 여성의 연대를 꾀하고 투쟁 노래를 통해 독립 의지를 다지는 삶이었다. 그녀에게는 열혈 투혼을 가진 가족이 있었고, 가문 전체가 게릴라부대가 되어 싸웠다. 희순은 외세와 타협 없는 투쟁(이항로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춘천의 잔다르크’였다.

한편 남자현은 철저히 개인 플레이로 싸웠다. 유학자의 가정에서 자라난 여인으로는 파격적일 만큼 자립적인 투쟁이었다. 싸움터에 홀로 나서서 나라와 남편을 빼앗아간 일제에 치명타를 먹이려 목숨을 걸고 덤볐다.

1896년 을미의병은 윤희순·남자현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36세 윤희순은 남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투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자식 부양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때 우연히 마을에 찾아든 의병들을 돌보면서 투쟁 의식이 제대로 싹 텄다. 24세 남자현은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의병전쟁에서 남편을 잃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항의도 복수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 속에서 일본에 대한 적의를 키웠다. 꾹꾹 눌러 참다가 1919년에야 독립투쟁가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할머니’였지만 독립투쟁의 무대에서는 당당한 주역이었다. 남자현이 하얼빈 감옥에서 단식 투쟁 끝에 61세로 숨지고, 윤희순이 일본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자식 앞에서 오열하며 절망 끝에 곡기를 끊고 75세로 돌아가는 광경을 번갈아 떠올리며 무엇이 저 여인들을 저토록 분기 어린 삶에 이르게 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윤희순의 노래를 더 들으며 그 뜨거운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너희들을 돌려보내 죽이잖고 분을 풀어 보내리라
너희놈들 오랑캐야 너 죽을 줄 모르고서 왜 왔느냐
너희들을 우리 대에 못잡으면 후대에도 못잡으랴
원수같은 왜놈들아 너희놈들 잡아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 조상님께 분을 푸세
의리 의병 물러스랴 만세만세 의병만세 만만세요
                            윤희순의 <병정가>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살려 살아보세
임금없이 살 수 없네 임금 살려 살아보세
조상없이 살 수 없네 조상 살려 살아보세
살 수 없다 한탄 말고 나라 찾아 살아보세
전진하여 왜놈 잡자 만세만세 왜놈 잡기 의병 만세

                            윤희순의 <의병군가>



▶ 윤희순 여사 사후 연표

1977년 박정희 대통령 건국훈장증 추서.
1982년 윤희순 생가에 ‘해주 윤씨 의적비’ 건립.(강원대학교 이상주 총장)
1990년 노태우 대통령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0년 여성단체 예림회, 춘천시립도서관 정원에 동상 건립.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국가유공자증 추서.
1993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윤희순 어록비 건립.
1994년 중국 해성시 묘관촌에 있던 유해 국내로 봉환, 춘천시 남면 관천리 두물머리에사설 애국자 묘역에 안장. 봉환 묘역 앞에 ‘애국선열 사적비’ 건립. 중국 옛 묘터에 기념비 건립.


이상국 아주T&P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