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가상현실 소설①]남자현코드(namjahyun 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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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3-1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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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홍대입구역 부근의 야경.]



# 용감한 남자

몇년전 평창동에 살던 시절, 경복궁에서 강남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나보다는 조금 위일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났다기보다는 같은 지하철칸에 우연히 동승하고 있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약간 험상궂은 얼굴을 한, 키가 크고 덩치가 실한 사내였다. 그는 같은 칸에 탔지만 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었고, 내가 그를 주목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저녁 8시 무렵이었다. 만취의 취객 하나가 내 앞쪽에 앉아있었다. 문득 그가 내쪽을 노려보며 불쑥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헤드폰을 끼고 있었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취객의 목소리가 사뭇 커졌을 때에야 나는 헤드폰을 벗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니 나를 겨냥한 건 아니었다. 내 옆에 앉은 여성 한 분이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어야할 여편네가 어딜 기어다니면서, 수다나 떨고... 서방이 뭘 하는 놈인지 참 궁금하네.” 비아냥을 잔뜩 섞어가며 전화기를 든 여인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는데, 여자는 자못 당황한 듯 하면서도, 목소리만 줄여서 계속 통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취객은 “사람 말이 말같잖나? 어딜 노려봐?”하며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거 뭐하는 겁니까? 이거... 술을 잡수셨으면 곱게 취하실 일이지...웬 행패냐구요?” 내 큰 목소리에 아주 잠깐 움찔하더니, 금방 기세를 회복해 심심찮은 적수를 만났다는 듯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니가 뭔 상관이야? 니 마누라야? 엉?” 알콜 냄새가 뒤섞인 침이 얼굴로 튀고, 나는 그가 밀어붙인 힘에 자리에 다시 주저앉을 뻔 했다. 여자는 벌써 저쪽으로 도망쳐서 질린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객들 중에서 작은 소리로 “왜 그러십니까”하는 항의가 나왔지만, 갑자기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지면서 이내 사라졌다.

그때 저쪽에 서있던 나이든 남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말없이 취객이 쳐든 손을 붙잡고는 꺾어내렸다. 마치 수갑을 채우듯 두 손을 엉덩이께로 잡아채더니 허벅지 아래를 쳐서 주저앉혀 버렸다. “다음 승강장에서 내리시오.” 그는 단호하게 취객에게 말했다. 마치 오라에 묶인 듯 꼼짝 못한채 무릎을 꿇은 취객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다음 정류장에서 취객은 고개를 잔뜩 숙인 채 비틀거리며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앉아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박수를 쳤다.

“아유, 수고하셨어요. 이쪽으로,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세요.”
“아, 예. 고맙습니다.”

사내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권했던 자리인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쪽이 큰 봉변 당할 뻔했어. 이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런저런 말을 걸던 아주머니가 내리고, 이쪽으로 쏠린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까지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주위가 다시 평온을 되찾을 무렵, 내가 헤드폰을 다시 끼우려고 했을 때 문득 그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았다. 눈썹이 짙고 콧매가 서늘한 얼굴이었다.

“언제, 저를 본 적이 있었던가요?”

그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어보였다.

“대한민국 사람은 세 다리만 걸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위기에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이제 확실히 아는 사람이기는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오래 전에 어디선가 저를 본 것 같지 않으신지요? 혜화동 골목에서나, 혹은 경북 영양의 수비마을 어귀에서나, 혹은 만주의 어느 주막에서.”

흠. 혜화동과 경북 영양, 그리고 만주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그리고 내 삶이 얹혀있던 지명들과는 도무지 겹치지 않는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혹시 시간이 있느냐고 그는 다시 물었다. 초면의 사내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생겨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쁘게 해야될 일이 있다고...

그랬더니 그는 수첩을 꺼내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더니 그 페이지를 찢어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연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그런데, 누구시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남자현씨 아시죠? 그분의 당부로 왔습니다.”

남자현? 내가 얼마전 잡지에 기고했던 인물스토리의 주인공 그 독립운동가 여인? 그분은 1933년 하얼빈에서 돌아가신 분인데?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분이 내게 무슨 당부를? 마치 남자현선생이 지금 살아계시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그는 미소를 크게 지으며 웃었다. “물론 살아계십니다. 곧 선생님을 만나게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전철이 멈춰섰고, 그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그 정류장에서 내렸다. 쪽지를 다시 펼쳐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010-####-0239, 蔡瓚” 다시 깜짝 놀랐다. 전화번호의 끝자리가 나와 같지 않은가. 나는 내 이름(이00)의 소릿값을 따라 0239를 즐겨 써왔고, 가족들이 쓰는 폰의 전화번호까지도 모두 뒷자리는 그 번호를 쓰고 있었다. 蔡瓚(채찬)?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채찬이 누구더라?

# 광야1933

그해 여름, 비가 잦았다. 나는 20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벗어나 비로소 백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못가던 여행도 다녀오고, 습한 그 주택의 지하 골방에 들어앉아 허리가 아프도록 글을 썼다. 자주 보던 사람들과도 연락이 뜸해졌고, 혼자 있는 시간들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졌다. 그런 시절인지라 누구에게 연락을 하는 일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성가시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만났던 흑기사 사내의 전화번호는 그해 9월까지 내 수첩 속에서 잊혀진채로 접혀있었다. 그해 여름 책 한권을 써서 출판한 뒤 기념회를 열기 위해 전화번호들을 뒤지던 끝에, 나는 낯선 필체의 그 쪽지를 다시 만났다.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기도 한데,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출판기념회에 초청해야겠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기에, 혹시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갔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침내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을 때 그때 그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 늦게 전화를 주셨군요. 내일 저녁 바쁘지 않으시면, 홍대 부근으로 좀 나오시기 바랍니다. 몹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거절의 말을 하려다가, 워낙 단호하게 그가 말하는 바람에 그냥 듣고 있었다. 출판기념회 초청의 말을 꺼낼 시간도 없었다.

“근데, 누가 기다신다는 겁니까?”

“선생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물론 선생님도 그 분을 잘 아시고요.”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한 건 아닌지요? 저는 채찬선생님을 잘 모르는데...그리고 8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을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도 상식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도 삶의 이면이랄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드러난 것들도 있지만, 그것의 원인을 이루는 것들, 그리고 보다 호흡이 긴 시간 속에서 인연으로 얽히고 풀리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질서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신 분이 아닌지요?”

“그러면 채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시는군요?”

“하하. 물론입니다. 저는 다만 현실이란 말이 매우 협소하고 잠정적이며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선생님이 이미 지어놓으신 길로 들어오시면, 오랫 동안 자라고 있던 큰 진실들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홍대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는 길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광야1933’.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이튿날 나는 40년지기 시골친구와의 선약을 미루고, 채찬이 말한 그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오후 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21세기에 남자현이 살아있다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오싹한 느낌도 들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홍대입구의 번화가와는 상관없이 주택가 저쪽 끝으로 올라가 주변을 몇 번이나 돈 끝에, 철제 대문에 한뼘도 안되는 목제 현판에 흘려쓴 글씨, 광야1933을 찾아냈다. 물을 먹은 나무에 글씨가 번져 얼핏 보면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생각했던 카페가 아니었다. 키 큰 꽃들이 비를 맞고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그때 안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채찬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우산을 받아 한쪽으로 세우면서 말했다.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제법 널찍한 거실이 펼쳐져 있고, 벽 주위에는 몇 개의 간소한 고가구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청동제 촛대 두 개가 불꽃을 물고 서 있었다. 채찬이 방석을 가져다주며 앉기를 권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인 하나가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찻상을 들고 나타났다. 생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는 내 앞에 그것을 높더니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등 뒤에 서 있던 채찬은 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찬찬히 벽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무궁화나 진달래, 국화 그림이 걸려 있었고 또다른 쪽에는 졸업 기념 사진인듯한 단체사진이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내가 들어온 현관 옆에는 남자현 여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사진이라는 그 얼굴 사진.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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