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지락필락智樂弼樂] 보랏빛 향기 가득한 새해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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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입력 2018-01-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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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얼마 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포츠머스에서 열린 해군 행사에서 선명한 보라색 코트와 모자를 착용했다. 군 사열식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상이다. 만약 우리나라 공식 행사에서 대통령 영부인이 이렇게 튀는 색깔의 옷을 입었다면, 들고 일어나 시비를 거는 미디어가 꽤 많았을 것이다. 청와대에 감 깎아 매달아놓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수준의 나라니까.

여왕이 보라색 옷을 입었던 그날 미국 색채전문기업 팬톤(Pantone)이 2018년 ‘올해의 컬러’를 발표했다. 바로 울트라 바이올렛(Ultra Violet), 쨍하게 선명하고 밝은 보라색이다. 4000여개의 고유 색상을 개발하며 ‘색채의 권력’으로 통하는 팬톤은 2000년 이후 매년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유행할 색상을 제시한다.

팬톤은 “독창성과 상상력이 필요한 세상을 사는 지금 울트라 바이올렛의 창의적 영감이 우리 의식과 잠재력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릴 것”이라고 선정 배경을 밝히면서 “프린스와 데이비드 보위, 지미 헨드릭스 등 전설적인 가수들이 즐겨 쓰던 색”이라고 덧붙였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프린스(Prince)의 가장 대중적인 히트곡은 둘 다 '퍼플 레인'(Purple Rain)이고,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전설적인 앨범 이름도 '퍼플 헤이즈'(Purple Haze)다. 여기서 ‘퍼플’은 자주색이 아니라 보라색이다. 보라색 비가 내리고, 보랏빛 안개라니···. 매우 몽환적인 음악이 연상된다.

보라색은 대중적인 색상이 아니다. 패션에도 적용하기 매우 까다롭다. 보라색 옷을 입고 잘 어울린다는 소리 듣기가 그만큼 어렵다. 보라색이 태생부터 귀족적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일단 자연에서도 보라색은 드물다. 꽃들은 모든 종류의 빛깔을 저마다 뽐내지만 보라색 꽃은 매우 보기 어렵다. 라벤더와 클라리 세이지, 팬지 등을 제외하면 보라색으로 피어나는 꽃은 보기 힘들다. 

야생의 라벤더와 세이지가 피어나는 곳도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전 세계 라벤더와 세이지 생산량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이들이 피어나는 지역은 척박한 고원지대다. 라벤더와 세이지는 자잘한 돌들이 많아서 농사를 짓기에는 황폐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이 지구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사한다. 6월과 7월에 라벤더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발렝솔(Valensole) 평원을 가면 보라색 지평선과 보랏빛 바다가 일렁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고대에서부터 중세까지 보라색은 ‘영원의 색’이었다. 거의 모든 색이 햇빛에 바래던 것과 달리, 보라색은 햇빛을 통해 생겨난 색이어서 바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보라색은 지중해에 많이 서식하는 가시달팽이에게서 얻었다. 달팽이가 분비하는 무색의 점액을 썩힌 다음 은근한 불에 달인 죽에 옷감을 넣어 햇빛에 말리면 처음엔 녹색, 그 다음에 빨강, 마지막으로 보라색으로 변한다. 그러나 염료를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달팽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로마 황제 제관식에 입을 외투 하나를 염색하는 데 무려 300만 마리의 달팽이가 필요했다. 지중해 연안에 가면 보라색을 얻는 데 쓰인 달팽이 패총이 산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있다.

따라서 보라색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금단의 색이었다. 로마에서는 황제와 계승자만이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는 자신만 보라색 옷을 입었고, 다른 사람의 보라 옷은 사형으로 금했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도 왕족을 제외하고는 보라색 옷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 평민들의 보라색 옷은 19세기나 돼서야 가능해졌다. 1856년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 Perkin)은 말라리아 치료약을 제조하던 중 인조 보라색을 합성해냈고, 특허를 내서 보라색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클래식도 권력층만을 위한 살롱음악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됐다.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기회, 누구나 행복할 수 권리가 바로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그릇된 권력 독점으로 그들만의 성채에서 보호받으며 따로 살아왔던 일부 특권층은 여전히 이런 시대정신에 극렬히 저항하면서 세월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의 수구반동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매우 완강한 힘으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결국 권력은 원래 주인이었던 평범한 국민의 손으로 돌아올 것이다.

강수지가 ‘보랏빛 향기’를 처음 불렀던 것이 벌써 1990년이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언제나 우리 /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가요···.

새해에는 보랏빛 향기가 모든 이들의 가슴에 넘실거리기를.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이 만들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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