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智樂弼樂] 위안부 문제와 일본 양공주 ‘팡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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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입력 2017-08-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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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의 智樂弼樂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사진=조용준]


위안부 문제와 일본 양공주 ‘팡팡’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 『금각사(金閣寺)』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 병사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일본 여성을 폭행하고, 주인공에게 여성의 배를 밟도록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밟아, 밟으라니까.”
저항할 수 없어 나는 고무장화를 신은 발을 들어 올렸다. 미군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발은 내려와, 봄날의 진흙처럼 부드러운 물체를 밟았다. 그것은 여자의 배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신음하였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1945년 9월부터 1952년 4월까지 7년여 동안 미군 통치를 받던 시절이다. 일본이 처음 경험한 타국의 지배였다.
위 장면은 미군 병사와 일본인 여성, 그리고 나 사이의 수직적 지배관계를 나타낸다. 당시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미국 사이에는 폭력적인 성적 지배구조가 일상화돼 있었다.
고지마 노부오(小島信夫)의 1965년 발표 소설 『포옹가족(抱擁家族)』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주인공은 가정부로부터 그의 아내가 미군 병사와 불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주인공은 자신의 집을 일본식이 아닌 미국식으로 지은 것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내 도키코는 미군 조지와 간통하고, 아들과 딸은 모두 가출을 함으로써, ‘붕괴가족’이 되고 만다. 이 소설은 낯선 부성(父性)의 조지(미국)가 모성적 일본 농경사회에 침입함으로써 일본은 창부로 변모하고, 일본에는 뿌리 없는 상실의 문화가 창궐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자주 해석된다. 당시 일본인들의 열패감과 열등의식은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올 정도였다.

일본의 전 국토가 군사 기지화가 된 이상, 우리들 일본인은 모두 ‘기지의 남자’이며 ‘기지의 여자’인 것이다. 만약 미군 전용 창부만을 특별히 기지의 여성이라고 부른다면, 일반 여성들은 기지의 여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본의 전 국토에 10겹, 20겹으로 뒤엉켜 있는 기지의 쇠사슬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이야 말로 무엇보다 위험하다. - 1953년 『속·일본의 정조(續·日本の貞操)』

그 자신은 물론 아버지와 할아버지 3대가 도쿄대학 법학부에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엘리트 집안으로, 30대에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던 미시마 유키오가 나중 극단적인 우익 군국주의자로 변모하는 데는 아마도 이와 같은 일본의 열패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미군 상대 양공주, ‘팡팡(パンパン)’의 육체는 일본인과 일본의 메타포였다. 그랬기에 유키오는 육상자위대 총감을 인질로 붙잡고 농성하면서 자위대의 국군화를 부르짖다가 오히려 비난을 받자 커다란 실망감에 할복자살한 것이다. 엘리트 그 자체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을 그에게는 패전 의식과 열등감으로부터의 탈출이 가장 급선무였을지 모른다.
미군 점령 초기 일본의 대응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각종 성적 위안시설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는 사실이다. 패전 이후 그들은 매매춘 시설을 설치하도록 솔선하여 유도하면서 설치와 운영, 자금 융자, 여성 모집까지 적극 참여하고 지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왜 그랬을까? 일본 내무성 경찰국이 오히려 매매춘을 부추긴 것은 바로 그들 진한 경험의 산물이다. 그들은 두려웠다.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소를 마련하여 아시아 여성의 성을 강탈하고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던 그들 자신의 만행이, 미군에 의해 일본 여성들에게 되풀이될까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신문에는 “벗지 마라 마음의 방공복(防空服), 여자는 빈틈없는 복장”과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 1945년 8월 도쿄 긴자(銀座)에는 ‘특별위안시설협회(RAA)’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도쿄 RAA를 공동 경영할 7개 단체는 “일억의 순결을 보호하고 이를 통하여 국체수호(國體護持) 정신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8월 3일 일본 새 외무상에 고노 다로(河野太郞) 전 행정개혁담당상이 임명됐다. 그는 자민당 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의 아들이다. 고노 요헤이는 관방장관 시절인 1993년 8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아들은 외무상으로 취임하자마자 “(위안부 문제는)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와 전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 시절 확인한 한일합의로 끝이 났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진실에 대한 일본인들의 계속되는 부정에는 책임 회피와 역사 감추기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혼네(本音·본심)’에는 열패감과 열등의식, 수치심과 공포감이 자리한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패전국으로서 도쿄 한복판에 위안소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그들의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결코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불쾌한 추억’이다. 그들은 그게 싫다.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자꾸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게 싫다. 그래서 되도 않은 어리광을 부리며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치졸하고 쩨쩨한 어린애 같다. 사과를 통해 대인배처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자꾸 숨으려고만 한다. 그럴수록 그들 자신의 상처도 깊어지는데 말이다.
※ 위 인용문과 일부 내용은 조정민 지음 『만들어진 점령서사』(2009)를 참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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