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적토마’ 영원한 ‘9번’…이병규 ‘LG의 전설’로 숨 쉬다

LG 트윈스에서 영구결번으로 남은 '적토마' 이병규의 등번호 9번. [사진=연합뉴스]

서민교 기자 = 지난 9일 서울 잠실야구장.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그라운드를 적셨다.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는 3-2 LG의 강우콜드게임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관중석을 가득 채운 2만여명의 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챙겨온 우산을 펴거나 비옷을 꺼내 입고 이별한 옛 애인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LG의 이병규! LG의 이병규!”

‘적토마’ 이병규(43)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날이었다. 잠실야구장 대형 전광판을 통해 기념 영상이 흘러나오자 어느새 이병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후배이자 동료들도 눈물을 훔쳤다. 9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찾은 팬들도 눈물을 쏟았고, 하늘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울었다.

지난해 은퇴한 뒤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병규는 이날 공식 은퇴식과 함께 영구결번식을 가졌다. 이날 이병규는 팬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 9번은 영원히 잠실야구장에 남아 그라운드를 달린다. KBO리그 영구결번은 역대 13번째, LG 소속으로는 김용수(41번)에 이어 두 번째다.

이병규는 LG의 전설이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7년 LG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 첫 맞대결 상대였던 해태(현 KIA) 에이스 조계현(현 KIA 수석코치)을 상대로 3안타를 때린 뒤 “신인이라고 봐주지 마시고 좀 성의 있게 던져 주셨으면 좋겠다”는 당돌한 인터뷰를 남긴 겁 없는 신인이었다. 그해 이병규는 신인왕을 받았다. 이후 이병규에게는 호타준족을 의미하는 ‘적토마’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병규는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서 뛴 3년(2007~2009년)을 제외한 17시즌 동안 LG 유니폼을 입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다. 그는 통산 7차례 골든글러브, 2차례 타격왕, 4차례 최다안타왕에 올랐고, 1999년 잠실 구단 첫 30홈런-30도루를 달성했다. 일본에서 복귀한 뒤 2013년 최고령 타격왕,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10연타석 안타로 암흑기를 보내던 LG에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다. LG는 2013년 11년 만에 정규시즌 2위로 가을야구의 꿈을 이뤘다. 2014년에는 역대 최소 경기(1653경기) 통산 2000안타를 돌파했다. KBO리그 17시즌 통산 성적으로는 타율 0.311, 2043안타, 161홈런, 972타점을 기록했다.
 

동료들에게 헹가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병규. [사진=연합뉴스]

이병규의 마지막 시즌은 아쉬움이 컸다. 양상문 감독 부임 이후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팬들의 염원과 달리 2군에서 타율 4할을 찍은 이병규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병규는 지난해 정규시즌 최종전인 10월8일 1군 무대를 밟은 것이 유일했다. 4회 대타로 나와 두산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단 한 차례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현역 시절 마지막 안타였다.

이병규의 은퇴식은 당초 그의 등번호를 상징하기 위해 9월9일로 계획됐다. 하지만 이병규가 원하지 않았다. 포스트시즌 경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두 달 앞당긴 7월9일 그의 작별 무대가 마련됐다. 이날 경기 전 마운드에 올라 시구자로 나섰고, 타석에는 아들 승민(12)군이 섰다. 경기 후에는 LG에서 동고동락한 이동현이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고, 타석에 선 이병규는 중전 안타를 때린 뒤 그라운드를 돌아 도열하고 있는 후배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마지막을 함께 했다.

이날 수많은 팬들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에 오른 이병규는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었지만 어색하진 않다. 김용수 선배에 이어 영구결번 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뤄져 영광스럽다”고 뭉클한 소감을 전했다.

이병규가 이날 남긴 또 다른 진심은 가슴을 울렸다. “제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무관’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영광된 자리지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는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한 불운한 천재였다. LG 입단 후 준우승만 세 차례(1997, 1998, 2002년) 차지해 현역 시절 우승 반지가 없다. 역대 영구결번 선수 중 1986년 사고로 사망해 애도의 의미로 영구결번된 OB 포수 김영신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우승 반지를 끼지 못한 선수다. 그는 “후배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고 떠나는 것 같다. 단단한 모습으로 LG 팬들이 원하는 우승을 이뤄주길 당부한다”고 전했다.

이병규는 이날 마음껏 잠실 그라운드를 달렸다. 후배들의 품에 안겨 하늘 높이 헹가래도 받았다.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와 함께 번쩍 든 그의 두 손에는 우승보다 값진 LG의 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지도자로 제2의 야구인생을 그리는 그는 내년 메이저리그로 연수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