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06]해외 무역의 성공, 한국경제 도약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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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3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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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06)

  • 제6장 재계활동 - (101) 한·일 무역협의체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무역협회로서는 정치문제인 한·일 국교정상화(韓·日 國交正常化)에 직접 관심을 갖거나 능동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1945년 종전으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무역계(貿易界)는 극소수의 상사들이 개별적으로 우리 해산물과 광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소비상품(消費商品)을 수입하는 소극적인 무역을 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다가 4·19 학생혁명(學生革命)이 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자본집단(大資本集團)인 한국경제협의회가 한·일 경제협력의 길을 트고자 나섰고, 1962년 9월에 가서는 일본 경제사절단(經濟使節團)이 내한하여 경제인협회와 두 나라 민간 경제협력의 방향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재계대표들이 한국경제인협회(韓國經濟人協會)의 공식 초청을 받아 내한하게 된 것은 1965년 4월에 가서였다.

그리고 국교정상화가 되자 1966년 3월, 제1회 한·일 민간 합동 경제간담회가 도쿄(東京)에서 열렸고, 1968년까지의 3년에 걸쳐 세 번 서울과 도쿄에서 번갈아 열렸다.

1969년에 간담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일 민간합동경제위원회(韓·日 民間合同經濟委員會)로 이름을 바꾸어 정식 기구를 발족시킬 때는 무역협회와 대한상의(大韓商議)가 개입했다. 그동안 한·일 경협을 이끌어 온 전경련(全經聯)을선 참여하겠다는 데 그를 거부할 수도 없었고, 그러자니 운영의 주도권 문제가 제기되어 시비가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의장(議長)은 3단체의 장이 서울과 도쿄에서 2회씩 교대로 맡고 사무도 의장을 맡은 단체의 사무국에서 돌아가며 맡아 보기로 낙착되었다. 동시에 위원회 안에 3개 분과위원회 중 경제협력분과회(經濟協力分科會)는 경제인협회가 산업기술분과회(産業技術分科會)는 상공회의소가, 무역분과회(貿易分科會)는 무역협회가 맡기로 하여 그대로 운영되어왔다.

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가 의견을 같이하면서 전경련과 대결할 때 하루는 전경련 김용완(金容完) 회장이 전화로 목당(牧堂) 이활(李活)을 불러냈다.

“목당 이 사람아, 언제부터 그렇게 염치없는 영국 신사가 됐어? 밥상 다 보아 놓으니 가로채자는 건가?”

사실인즉 그렇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이사람, 동은(東隱), 무슨 소리야, 먹을 사람은 세 사람인데 독상(獨床, 한 몫으로 혼자 먹게 차린 음식상) 차려 혼자 먹겠다는 건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심 사나와졌어?”

제1회 합동경제위원회는 서울 워커힐에서 1969년 1월 27일에서 29일까지 3일 동안 열렸다.

한국측
의   장      김용완(한일경제위원회 위원장)
대표·고문   박두병(상의회장)
               이   활(무협회장)
단   장      김용완
단   원      최태섭(한국유리) 외 115명

일본측
단   장      우에무라 고고로(植村甲午郞, 게이단롄 회장, 일한경제위원회장)
부단장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祿, 일본상의상담역)
              히로타 세이이치(廣田精一郞, 도요레이온)
단   원      이소베 아키라(磯部 明, 오쿠라상사(大倉商社))

일본측은 게이단롄·일본상의·일본무역회·일한경제협회의 4개 단체가 공동 주체단(主體團)이 되어 게이단롄 주도 아래 일한경제협회가 업무를 대행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일본상의나 일본무역회는 경제단체 서열에서 훨씬 뒤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게이단롄이 주도하는 데 말썽이 있을 리 없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대한상의는 전통이 있었고 무역협회는 실력단체로 막강한 존재였다.

이렇게 되어 제2회 합동경제위원회는 단장 이활, 부단장 나익진(羅翼鎭), 제3회 또한 의장 이활이 회의를 집행했다.

제2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고, 제3회는 다시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그런 가운데 무역분과의는 서울과 도쿄에서 해마다 별도로 개최되어 왔고 1971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간 동 위원회는 한·일무역 현안문제 중 관세(關稅) 인하 문제, 가공무역(加工貿易)의 추가 문제, 특혜 관세 문제, 수입 제한 문제, 그리고 제도적인 저해요인 해소 등 광범위한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한·일 민간 합동 경제위원회는 한·일 두 나라 재계(財界) 행사 중에 가장 규모있고 화려한 국제회의가 되어왔다.

한국무역협회 회원 상사들은 합동 경제위원회와 무역 분과위원회를 통해 국제회의의 귀중한 체험을 쌓았다.

한국 경제는 계속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1970년에는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200달러 선을 넘어서게 되었고 1971년에 가서 수출액(輸出額)은 10억달러를 넘어서서 도약기(跳躍期)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간 무역협회와 정부 사이는 정기적인 무역 확대회의를 통해 밀착되어 왔다. 정권의 유지는 무역의 성공에 힘입었고 그만큼 그들은 무역 확대 정책에 진지했다. 이리하여 수출제일주의(輸出第一主義) 정책에 입각한 수출 드라이브 체제를 강력히 구축할 수 있었고, 총력 수출태세의 확립에 의한 장기 수출 목표의 계속적인 달성으로 자립경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한국경제가 도약기에 접어들자 세계는 한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또한 주목하였다.

실상 한국경제의 성공은 해외 무역의 성공을 말해주었다. 한국무역협회 회원 상사들의 자각(自覺)과 능동적인 행동성(行動性),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일찍 잠을 깬 지식층이었다. 정치가 민주주의 토착을 위한 시련을 거듭하고 있을 때, 무역업자들은 한국무역협회를 중심으로 협력하면서 한국 무역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는 데 저력을 과시했다. 한국무역 개척기(開拓期)에 그들이 보였던 협력정신과 개척의지가 그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즉 한국 무역의 성공은 업자들의 예지(銳智)와 협회를 이끈 지도자들의 예지(叡智)의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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