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6주년 기획 上>냉전시대로의 '회귀'인가 '주권' 찾은 외교인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6-06-23 01:0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한국전쟁 당시 국제적 위상은 바닥

  • 南, 6·23선언 후 공산권 교류 박차

아주경제 강정숙 기자 = 6·25전쟁이 발발한 지 66주년이 됐다.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비극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여전히 남과 북의 관계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남북의 군사력 경쟁은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개발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수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북한은 22일에도 무수단(BM-25)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도발을 멈추고 있지 않고 우리 군은 즉각적인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AP통신이 본 6.25와 서울'.  종전 직후 명동성당·마포·영등포 일대는 물론, 폐허가 된 서울을 고스란히 담아 전쟁의 참화.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흐른 시간만큼 달라진 것도 있다. 남과 북의 국제적 위상 차이는 66년의 시간만큼이나 그 간격은 커졌고, 국제사회에서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남한은 탈냉전 이후 과거 공산국가들을 포함한 비 동맹국들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외교적 저변확대를 넓혀나가는 한편, 북한은 점점 더 고립돼 가고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은 곧 '주권'"이라고 말하는 권순대 전 인도대사(외무고시 1기)는 자신의 저서 '한 외교관의 도전'에서 "(그동안 한국이) 어떤 외교적 대가를 치뤄야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며 "외교가 살아남아 활기를 되찾으려면 외교관들의 도전 정신이 과거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지금이 그 능동적 외교를 펼쳐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 '외교'는 곧 '주권'

6. 25의 발발의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이를 뒤로하고도 명확한 것은 당시 남북한 모두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한반도 무력 통일을 원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중·일·소 등 외세는 국제적 상호작용을 감안해 (무력 통일을)주저했다. 다시 말해 당시의 한국릐 외교력, 즉 '주체성'은 '제로(0)'라 할 수 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980년대까지 역대 군사정권들이 군인들을 대거 외교관으로 기용하는 등 '외교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때문에 여전히 우리의 외교력과 국제적 위상은 바닥이었다.

1990년 미국의 일개 동·아태 차관보가 방한했을 때 우리나라 부총리와 외교·국방 및 상공 장관은 물론 정당 대표와 청와대 특보 등을 모두 만나고 떠난 일화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라 체면은 둘째치고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고, 외국의 잘못된 처사가 있어도 외교 사령탑인 외교부가 모른척 하거나 소방대 역할을 하는데 그쳤다.

◆ '6.23 선언' 후 공산권과 접촉 시작

한국의 체계적 공산권 접촉의 시작은 1973년 6.23 선언으로 불리는 우리 정부의 '평화통일 외교정책 특별선언'이 있은 후이다.

박정희 정부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상황 파악과 이에 대한 능동적 대처 차원에서 대(對) 공산권 문화 개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 공산권 외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한국의 공산권 진출이 본격화한 것은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이후다. 특히 이 시기 정부가 내놓은 북방정책은 한국의 북방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시 중공·소련 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중·소 양국과 경제 협력을 통한 경제 이익의 증진을 추구함에 있었다.

그러나 1983년 9월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격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소 간 접촉은 중단됐고 이를 통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외교력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경기도 파주 비무장지대 내 판문점에서 한 북한 병사가 빈센트 브룩스 신임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과 이순진 합참의장이 판문점을 둘러보며 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국제사회는 지금 북한에 시행하고 있는 대북제재에 버금가는 제재를 소련에 취했고, 소련의 행위에 대한 규탄이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규탄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던 정부의 북방정책에도 타격을 받게됐다.

심지어 KAL기 격추 사건 발생 한달 열흘만에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을 겪으면서 한국 국민들의 안보에 대한 불안감은 국가 방위 태세를 한층 더 강화하는 동시에 대미, 대일 안보에 모든 힘을 쓰게하는 '안보외교'에 치중하게 했다.

그 이후 세계 정세의 변화속에 냉전이 종식됐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북한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참가하면서 우리의 외교 영역은 공산국가들까지도 뻗게 된다.

기세를 몰아 정부는 1989년 이룬 헝가리와의 수교를 필두로 폴란드와 유고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했다.

1992년 8월 한국은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하며 사실상 북한의 혈맹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뤘다. 하지만 북한은 같은 시기인 1993년 3월12일 전격적인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 발표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 총성없는 전쟁

북한이 공해상으로 쏘아 올리는 미사일 외에도 남북한은 현재 외교무대에서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60~70년대 냉전시대를 거쳐 90년대 초까지 '친북 국가 공략'에 외교력을 집중했던 한국은 2016년에도 이를 여전히 재연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이후 강력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바꾸겠다는 정부의 대북 압박·고립정책에 따른 것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과는 달리 그 전장은 세계로 변했다. 그 선봉에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있다.
 

지난 5일 한·쿠바 첫 외교장관회담. [사진=아바나 외교부 공동취재단]
 

윤 장관은 지난 5일 한국 외교수장으로는 처음 '북한의 형제국' 쿠바를 방문했다.

이어 13일엔 러시아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과 만나 대북제재 이행 공조에 합의했다.

윤 장관은 15일엔 북한의 유럽 남동부 거점 국가인 불가리아를 방문, 북한 해외 노동자에 대한 국제적 공조에 불가리아의 적극적 동참을 받아왔다. 21일에는 해리 칼라바 잠비아 외교장관을 만났다.

외교부 당국자는 "올 들어 50여 개국 및 국제기구가 북한과의 고위 인사 교류, 외교공관 개설, 협력사업을 재검토했다'며 "한마디로 '북한과 굳이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나라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한반도 정세가 답보 상태를 넘어 몇 십년 전으로 후퇴하는 것 같은 마당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 추진 시도는 말 그래도 과거 냉전시대로의 회귀일 뿐, 외교저변 확대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쿠바 관계 정상화 노력이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외교적 방편으로만 소비된다는 지적이다.

한 퇴임한 외교관은 "냉정시대로 회귀로 보일지 모르나 과거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바닥일 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 하다"며 "외교는 곧 국력이며 위상"이라고 강조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