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가전략 수정, ‘전쟁전야(戰爭前夜)’로 거침없는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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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0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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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오바마 히로시마 방문 수수방관(袖手傍觀) 할 일인가?

[박종렬 가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교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지난 달 5월27일 히로시마(廣島) 평화공원에서 원폭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헌화 장면은 우리를 착잡하게 한다. 오바마가 취임 첫해인 2009년 4월 프라하에서‘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한 이래 일본이 7년간 공들여 임기 마지막 해에 미국 역사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세계 유일 피폭 현장 방문을 성사시킨 것이다.

백악관은 “원폭 투하를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양국에 박힌 역사의 가시를 빼는 일’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핵무기 ‘피해자’ 이미지를 전세계에 부각시켰다.

제국주의 야욕으로 조선과 중국 등 주변국을 침략, 아시아에서 2,000여 만명 이상을 학살한 전범국가 일본은 원폭투하 이전에는 수십 년간‘ 가해자’였다. 최근까지도 명확한 반성과 사과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체 오히려 과거를 왜곡, 부정하고 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방문한 히로시마 역사적 함의(含意)는 무엇인가?

일본의 해외 침략전쟁시 교두보로 조선인의 피어린 아픈 역사가 응결된 현장이 바로 히로시마다. 정한론(征韓論) 실천으로 조선 침략을 시도한 첫 걸음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진기지로 일본제국 육군·해군 최고 통수기관이자 천황이 머무르며 진두지휘한 전쟁사령탑인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된 곳이 바로 히로시마 아닌가?

청일전쟁 뒤 1895년 조선 병탄을 획책하던 일본정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언을 들먹이며 ‘여우사냥’이란 작전으로 명성황후를 궁중에서 칼로 참혹하게 찔러 살해한 뒤 능욕하고 불에 태워 증거인멸을 기도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야만적 테러를 자행했다.

그동안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라는 게 통설이지만 시해범은 ‘단순한 낭인이 아닌 일본군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 (이 종각『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라는 지적처럼 히로시마는 미야모토 소위 등 현역 군인을 포함한 명성황후 살해 주역 48명이 구속됐다가 무죄 석방된 곳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악 15개 조 중 첫 번째로 명성황후 살해를 들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하수인들이 저지른 치밀하고 조직적인 국가범죄 용의자 전원을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법률적으로 정리한 곳이 바로 히로시마 법정이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 주역으로 피신해 있던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망치로 척살당한 곳도 바로 히로시마 구레시다.

인류 역사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는 이처럼 일본 어떤 지역보다 조선과는 운명적으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얽힌 지역이다.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지정학적 관계로 엮어진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개관해볼 때 인연(因緣)과 과보(果報)의 고리가 물 샐틈없이 짜여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범죄 도시에서 세계평화 심벌도시로 변신한 히로시마는 일본 주코쿠 지방 중심도시로 피폭 당시 인구 30만이 넘는 일본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일본군 43,000 여명이 주둔하고 있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소 등 병참기지가 있던 히로시마에 강제징용이나 이주 등으로 머물고 있던 조선인들도 원폭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으니 식민지 백성은 이중으로 피해를 본 것이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5만 여명, 나가사키에는 2만 여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중 4만여 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생존자 중 약 2만 3,000여 명이 해방 후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다수 생존자는 원폭 후유증과 빈곤,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한편,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에 따르면 2015년 3월 말 기준으로 일본 밖에 살고 있는 피폭자 수첩 소지자는 4,300여명, 이 가운데 한국 거주자는 2,500여명(북한 거주자 1명)이다. 한국 원폭 피해자는 1945년 당시 4만 여명으로 추정됐지만 고령과 치료비 부족에 따른 사망으로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지난 71년간 사실상 이들을 외면하다시피 한 한국 정부가 최근에 특별법 제정에 나서자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이나 미국 정부보다, 자국민 보호에 소홀한 한국 정부가 더 밉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태평양 전쟁 피해를 보면 중화민국은 280만 여명 가량 사상, 1500만 여명가량 민간인이 사망했다.

731부대에서 마루타가 되어 세균병기와 화학병기를 실험하기 위해 각종 세균과 화학물질을 투약된 생체실험 피해자와 소총을 테스트한다고 산 사람을 세워두고 사격하는 경우까지 한국인과 중국인을 합쳐 '40여 만 명으로 추산된다.

조선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인명피해 (1592년 ~ 1598년)는 '30여 만 명' (그 중 12만여 명의 코와 귀가 잘려나감)이며,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일본 측이 발표한 사망자만 '7600여 명,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도 '6000여 명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에서 피해자 입장’ 둔갑시켜 전쟁광적인 일본 블랙 국가이미지 왜곡. 탈색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방문으로 세계 주목을 끈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일본 침략의 최대 피해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본은 ‘평화’를 콘셉으로 히로시마 평화대공원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 일본 국가이미지를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 아닌 피해자 입장’으로 둔갑시켜 전쟁광적인 일본의 블랙 국가이미지를 평화적 색채로 탈색시키는 이른바 ‘히로시마 마케팅’의 역사 왜곡 조작을 극적으로 시도해 전 세계인을 속이고 있다

1905년 러-일 전쟁 직후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미국-일본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 만이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비밀리에 ‘필리핀은 미국, 조선은 일본이 지배한다’는 약속을 한 미국을 ‘형님의 나라’라며 극진히 대접했던 고종이 통치하던 구한말 조선의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정보가 없었던 비극이 데자뷰 현상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강대국들 간에 이미 한반도 식민지화를 놓고 협상이 끝났는데도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노골적인 국제권력정치의 현실에 무지했던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 비분강개했지만 폐위되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강대국 눈치를 보며 이리 붙고, 저리 붙다 결국 남의 나라 대사관에 1년 넘게 몸을 의탁해야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는 등 줏대 없이 오락가락 하다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의 역사적 비극은 ‘국가전략이 없는 국가는 좌절할 수 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웅변으로 보여줬다.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수도를 서울로 이전하는 프로젝트로 '경성 천도론'을 주장했던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자 도요카와 젠요(豊川善曄)는『경성천도』에서 "조선인은 4천년 동안 조선 반도에 거주하였을 뿐, 지금까지 이곳을 지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바 있다. ‘도쿄의 서울 이전 계획과 조선인 축출’로 800만 일본인을 이주시켜 한반도 영구 지배를 촉구했던 도요카와 식의 야욕을 포기할 일본이 아님을 우리는 독도 침탈 기도에서 엿볼 수 있다.

다시 꿈틀대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은 메이지유신(明治)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수상이 가장 존경하는 멘토가 바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한론(征韓論) 원조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된 1번 신위로 위패가 자리잡고 있다. 아베 유년 시절 무릎에 앉히며 키워준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는 롤 모델이다.

요시다 쇼인은 ‘유신의 태동지’이자 ‘정한론의 요람’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설 교육기관에서 3년의 짧은 기간 90여명의 후학을 배출했다. 하급무사가문 출신의 시골 서생인 요시다 쇼인은 1850년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일본근대화의 출발’ 이기도한 ‘쇼카손주쿠’에서 ‘천황가 숭배와 천황가 부활의 본산’임을 자임하고 명치유신의 주동이 된 인물들을 가르쳤다.

'메이지유신 3걸'로 이름을 날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그리고 군부 실력자로서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한국병탄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막부타도의 선봉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명성황후 살해 배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한일병탄 당시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 등에게 정한론을 가르쳤다.

쇼인의 사상적 뿌리는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만세일계설’이다. 천황가는 태고적부터 신의 혈통을 받은 신의 자손으로서 한번도 대가 바뀌지 않은 만세일계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8세기의 『일본서기』가 꾸며낸 이야기로서 새빨간 거짓말이다.

요시다 쇼인은 ‘만세일계설’ 뿐만 아니라 “옛 삼한은 일본의 속국이었으니 일본은 조선을 다시 속국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 침략은 일본인이라면 대를 이어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숭고한 의무다.” 등『일본서기』의 ‘삼한정벌설’을 맹신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세뇌시켰다.

1850년대 이렇게 ‘쇼카손주쿠’에서 ‘정한론’이 발아(發芽)된 것이다. 존황양이(尊皇攘夷) 신봉자 쇼인은 유수록(幽囚錄)을 통해 외압에 직면한 일본의 침로(針路)를 이렇게 제시했다. “조선을 속국화하고, 만주와 대만, 필리핀 루손섬을 노획한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중국 영토를 점령하여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國富)를 약자에 대한 착취(搾取)로 메우는 것이 상책이다.”

일본은 서세동점 시대의 물결을 타고 일본 근대 최고 사상가로 꼽는 쇼인의 노골적 약육강식(弱肉强食) 국가전략에 열광했고, 이런 사조는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으로 귀결된다. 피비린내 나는 일본제국국주의 역사는 이미 비극적인 국가파탄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가 일본식 침략용어인 ‘어리석은 나라’로 한국 지목

국수주의자로 A급 전범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고도 극적으로 회생해 총리까지 지냈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정치ㆍ사상적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아베 총리 행태는 현대판 정한론을 실천하기위한 평화헌법 개정 야심으로 그 마각(馬脚)을 드러내고 있다.

쇼카손주쿠 혈맥(血脈)인 아베총리가 일본식 침략용어인 ‘어리석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자, 그의 측근들은 즉각 ‘새로운 정한론’이라고 맞장구 쳤다. 일본의 주요 언론과 정가로부터는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을 한나절 안에 접수할 수 있다.”, “한국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청구하면 일본은 금융공격으로 한국 경제를 무너뜨려야 한다.”, “엔 캐리자금을 동원하면 한국경제를 하루만에 마비시킬 수 있다.” 는 등 일본에서는 혐한론에 이어 변형된 정한론이 횡행하고 있다.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국가전략을 수정하고 ‘전쟁전야(戰爭前夜)’라는 국가 전쟁시나리오를 설정, 숨가쁜 폭주를 감행하고 있다.

한반도 침략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해 온 일본의 야욕 실천이 혈맥으로 이어진 아베의 리더십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의 한반도 침략주기에 들어있는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도 한반도는 남북분단에 이어 지역으로, 이념으로 사분오열(四分五裂) 돼 싸우고 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라지만 한반도가 전쟁터가 돼 무고한 조선인들이 살상당했고, 최근세사인 6.25 전쟁도 본질적으로는 중-미 전쟁으로 한국인들은 총알받이가 되었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6.25 전쟁은 실제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 중국 등이 이데올로기 대결이 치열했던 냉전시대에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해 벌인 국제전쟁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전쟁이라고 전부 ‘대놓고 벌이는 거짓말’로 호도하고 있다.

‘과거를 눈감으면 비극이 반복되는’ 필연적인 역사 법칙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가 입증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그동안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침탈기도 등을 규탄했지만, 국가적으로 명성황후 살해라는 야만적 만행에 대한 사과나 항의를 한 기록이 없다. 120여년이 지난 지금 여러 정황증거와 역사적 기록들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와 그 하수인들이 조선병탄을 위해 저지른 치밀하고 조직적인 국가범죄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음에도 어떤 신원(伸寃) 움직임도 없다. 지도층의 역사적 무지와 양식(良識) 없음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강대국에겐 국제법이 필요없다.” 는 냉혹한 국제권력정치의 불문율을 되새길 때다.


박종렬(朴鍾烈) 가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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