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류승룡 "'비광', 거절 했었지만…감독 편지 읽고 마음 돌렸죠"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명량' '극한직업' 등 네 편의 천만 영화를 이끌고, 드라마 '무빙' '파인: 촌뜨기들' 등을 통해 장르를 넘나드는 존재감을 보여온 배우 류승룡이 영화 '비광'(감독 이지원)으로 벼랑 끝에 선 아버지를 그린다. 극 중 류승룡은 벼랑 끝에서도 딸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구를 연기한다.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로 '아버지'를 연기해왔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절박한 부성애를 꺼내며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시놉시스만 보고 고사를 했어요. 그때 제가 한참 아빠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염력', '손님', '7년의 밤'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아이를 세이브하는 아빠들이 이어져서 한동안은 아빠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편지를 써주셨어요. 이 작품이 단순히 부성애만 부각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편지를 통해 알게 됐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다시 정독하게 됐어요."

이지원 감독의 편지는 작품을 향한 태도와 류승룡을 향한 신뢰가 담긴 글이었다. 류승룡은 그 안에서 감독이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또 왜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를 느꼈다고 했다.

"감독님이 한 다섯 장 정도를 써주셨는데, 본인의 가족사, 왜 영화를 하려고 했는지, 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 자기에게 영화란 무엇인지가 담겨 있었어요. 그리고 왜 류승룡과 이 작품을 하고 싶은지도 정말 정성껏 써주셨어요. 마음이 움직일 정도였고, 진심이 느껴졌어요. 저는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다시 읽으니까 감독님이 의도하는 바가 전해졌어요."

영화의 제목인 '비광'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류승룡은 화투패 '비광'에 담긴 이미지 안에서 위기를 견디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희망의 의미를 읽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런 오해도 있었죠. 화투 영화인가, 도박이 나오나 싶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화투패 '비광'에 대한 이야기를 감독님이 해주셨어요.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 가족들이 위기를 다른 좋은 에너지로 만드는 모습을 보고 관객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각자는 완전하지 않지만 모였을 때 비로소 시너지를 내는 것.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분명히 빛은 있다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더라고요. 화투패 하나로 이렇게 많이 생각해본 건 처음이었어요."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비광'은 중구라는 인물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감정의 진폭이 큰 역할이었으나 시나리오가 촘촘하게 설계되어있어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고 설명했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견고했어요. 감독님이 이 작품뿐 아니라 신림동 고시원에서 6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던 간절함이 설계도 안에 들어 있더라고요. 조명의 개수, 위치, 콘센트의 위치, 벽지 같은 것까지 자세하게 써 있어서 결국 저는 그것들을 어떻게 잘 구현할까를 고민했어요. 구현해내는 게 어려웠지, 감독님이 길잡이 역할을 너무 잘해주셨어요."

중구가 딸인 동주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류승룡에게도 쉬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류승룡은 이지원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중구가 느끼는 부성애와 가족들의 사랑을 이해해갔다.

"저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감독님하고 많이 이야기했죠. 김해숙 선생님이 남미에게는 이혼한 전 며느리인데도 친딸처럼 진심을 다해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하잖아요. 또 김영민 배우가 맡은 인물도 피가 안 섞였는데 가족 구성원처럼 자기 역할을 잘하고요. 중구 역시 쉽지는 않았지만, 그 가족의 분위기 안에서는 가능했을 거라고 봤어요."

류승룡은 극 중 중구의 20대부터 40대까지의 시간을 직접 소화해냈다. 류승룡은 "CG도 많이 쓰였지만 직접 피부관리도 하는 등 준비를 해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안 하던 짓을 많이 했죠. 매일 팩도 하고요. 나름대로 관리를 했습니다. 하하. 감독님이 비주얼이나 소품, 의상 하나하나를 정말 호락호락하게 보지 않으셨거든요."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의상과 소품은 단순히 보기 좋은 장식이 아니라 중구의 과거와 취향을 설명하는 장치였다. 류승룡은 인물의 외형 안에도 감독의 세밀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죠. 화려한 옷들도 단순히 멋을 내기 위한 게 아니라 중구의 취향이고, 그 사람이 버리지 못한 과거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남미의 옷도 일관성이 있고요. 감독님이 문을 열고 나올 때 순백색 티를 입힌 것도 결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선택들이 다 인물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원과의 호흡도 중요했다. 중구와 남미는 사랑과 원망, 애증이 뒤엉킨 관계다. 류승룡은 하지원의 좋은 리액션과 유연한 호흡 덕분에 복잡한 부부 관계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원 배우는 우리나라에서 리액션이 제일 좋은 배우 같아요. 진지한 리액션도 그렇고, 웃음도 정말 좋아요. 보잘것없는 하찮은 유머에도 웃어줘요. 너무 고맙죠. 현장에서는 중구와 남미의 복잡하고 미묘한 부부 관계를 같이 만들어가야 했는데, 하지원 배우가 정말 잘 받아줬어요."

톱스타였던 남미와 중구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이야기는 배우 류승룡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을 불러왔다. 그는 인생의 굴곡을 통과하며 유연함과 침착함을 배웠다고 했다.

"인생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굴곡을 스스로 느꼈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 많이 배웠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이지 않는 창살에서 나오게 되고, 유연함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마음의 예산을 넉넉하게 두고, 당황하지 말고 유연하게 받아들이자. 그런 침착함이 생긴 것 같아요."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쉼의 방식도 달라졌다. 한때 목공과 가죽 작업, 흙을 만지는 일로 시간을 채웠던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코로나 때 작품들이 연기되면서 시간이 생겼고, 저는 가만히 못 있거든요. 그때 목수 일도 하고 가죽도 하고 흙도 만졌어요. 지금은 그렇게 꾸준히 할 수 없는 스케줄이 많고, 운동도 하고 제주 올레도 걷고 맨발 걷기도 해요.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공격적으로 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요즘은 음악 틀어놓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가사 없는 클래식 피아노 같은 걸 틀고, 조명 은은하게 해놓고, 환기 잘 시키고, 로봇청소기가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게 왜 그렇게 힐링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가만히 쉬는 일은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오래 경쟁 속에서 살아온 세대의 감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가 그동안 저를 너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는 강박이 있었죠. 70년대생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잖아요. 성인이 되고 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쉰 게 언제였나 떠올려보니 거의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해보자, 그게 저에게는 큰 도전이었어요. 그것도 훈련이 필요하더라고요."

한동안 아버지 역할에 대한 부담을 느꼈던 생각도 이제는 달라졌다. 류승룡은 모든 아버지가 같을 수 없으며, 같은 이름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때는 아버지 역할들이 잘 안 됐고, 울고 짖고 하는 부분들이 이어졌어요. 그래서 스스로 제 연기를 돌아보는 과도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다 같은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다 다르죠. 그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어요. 예전에는 강박이나 편협된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영화 '비광' 주연 배우 류승룡 [사진=(주)플레이그램]

류승룡은 '비광'에 관해 "이야기의 힘과 배우들의 호흡을 진득하게 따라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코미디부터 드라마,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상상력 가득한 작품들을 선택해온 그는 '비광'을 통해 다시금 밀도 있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호흡이 중심이 되는 작품에 끌리게 됐다고 말했다.

"저는 엉뚱한 이야기도 좋아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이야기도 좋아해요. '닭강정'이나 '아마존 활명수', '무빙' 같은 작품들도 그렇죠. 앞으로 그런 좋은 콘텐츠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그런데 '비광'은 오롯이 이야기의 밀도와 배우들의 연기, 호흡을 진득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그런 작품들을 선호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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