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과 3500억달러(약 47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에 합의한 지 1년여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투자에 속도를 내지 않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 미국 측 소식통은 한국이 "서둘러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격노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 협조하지 않았다며 한국을 콕 집어 비판한 배경에도 투자 지연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전했다.
미국 워싱턴 소재 컨설팅 기관 '아시아그룹'의 제니퍼 리 파트너는 "미 정부 내 불만이 상당히 쌓여왔다"며 "특히 일본이 연이어 투자 발표를 하는 것과 비교되면서 그렇다"고 언급했다.
일본도 지난해 7월에 미국과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후 일본은 오하이오 가스발전소, 테네시·앨라배마 소형모듈원전(SMR) 등 구체적 프로젝트를 잇달아 발표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이렇다 할 대미 투자 프로젝트가 발표되지 않으면서 미국 측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주 대미 투자 1호 프로젝트로 텍사스 가스발전소 사업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으나, 대통령실은 이번 주 구체적인 투자처와 발표 시기, 최초 송금 규모와 시기 등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았다며 유보적 자세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민에게 이 합의를 설명하며 상업적 타당성이 있는 사업에 한해서만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국립외교원의 민정훈 교수는 "기업들은 사업성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한국으로선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빠른 성과를 원하지만 양측의 입장은 다르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난해 9월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에 대한 미 이민단속국(ICE)의 급습도 한국 기업들을 위축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이 대통령은 당시 이 사건이 한국 기업들을 미국 투자에 "매우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제니퍼 리 파트너는 두 정부 간 합의 해석에 "실질적인 간극"이 있다며, 미국은 개별 프로젝트에 대한 더 큰 규모의 투자 및 선정 과정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미국 내 첨단 메모리 생산 투자도 압박하고 있는데, 이는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한국으로선 민감한 사안이다.
반면 조선업은 한국이 협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미국은 전 세계 상선 시장에서 0.2%만을 차지하는 반면 한국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조선강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 조선업 재건 구상은 한국이 제시한 '마스가(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와 맞물려 한국 기술과 노하우를 미국 조선업과 접목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시간을 끌면서 스스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낮은 지지율로 위기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제시할 '트로피'가 필요한 상황에서 한국의 투자 지연이 불만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경제연구소(KEI)의 트로이 스탠거론 소장은 "한국이 초기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지연될수록 트럼프 행정부에 약속을 회피하려 한다는 인식을 줄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그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호르무즈 파병을 거론한 것은 대미 투자 촉진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며 실제 파병을 하더라도 대미 투자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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