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분에 달하는 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붙잡은 건 트로이 전쟁의 승리보다 그 이후의 이야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디세우스는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다.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난공불락의 성을 무너뜨린 영웅이 됐다. 승전보를 들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 다시 10년이 걸렸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마녀 키르케를 만나고, 세이렌의 유혹을 견뎌야 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의 좁은 바다를 통과하면서 동료를 하나둘 잃었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귀향은 전쟁만큼이나 험난했다.
요즘 한국 경제에도 모처럼 승전보가 잇따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출이다. 지난 5일 오후 1시 기준 올해 누적 수출액은 7094억 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1년 동안 거둔 역대 최대 수출액 7093억 달러를 9월 초에 이미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 연간 실적을 무려 117일 앞당겨 달성했다.
수출과 기업 실적 개선이 성장을 끌어올리고 세수 역시 빠르게 늘고 있다. 정부는 이런 경제 여건을 바탕으로 내년 총지출을 올해 본예산보다 12.8% 늘어난 820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정부는 내년 국세수입 가운데 최근 10년간 내국세 추세선을 웃도는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미래대응기금으로 돌리기로 했다. 이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에 투자하고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 발행을 줄이는 데 활용한다. 호황기에 생긴 여력을 미래 성장과 재정 안전판에 쓰겠다는 구상이다.
기금의 이름 그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응하는' 일이다. 지금의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수출 신기록의 이면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올해 1~8월 반도체 수출은 2812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9.6% 급증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40.6%다. 8월 한 달 반도체 수출은 466억5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절반에 육박했다. 우리 경제의 화려한 승전보 상당 부분이 글로벌 인공지능(AI) 투자와 반도체 슈퍼사이클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호황의 크기가 클수록 그 뒤에 찾아올 조정에도 대비해야 한다.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고 글로벌 AI 투자가 둔화하면 기업 이익이 줄고 수출과 세수가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 지금 넘쳐나는 세수를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돈으로 여기고 항구적인 지출을 늘린다면 경기가 꺾였을 때 재정은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에는 세이렌의 유혹이 있었다. 그 노래에 홀린 선원은 항로를 잃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 역시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를 돛대에 묶었다.
경제에도 세이렌의 노래가 있다. 호황기일수록 스스로를 돛대에 묶을 장치가 필요하다. 일시적으로 늘어난 세수와 구조적으로 늘어날 세수를 구분하고 불황 때 꺼내 쓸 재정 여력을 남겨둬야 한다.
반도체가 벌어준 돈으로 또 다른 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AI와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청년 고용과 지역 산업, 새로운 수출 먹거리를 키워야 한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가 오디세우스 이야기의 끝이었다면 '오디세이'라는 대서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승리보다 어려웠던 것은 승리 이후 항로를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호황은 목적지가 아니다. 반도체 사이클은 언젠가 내려오고 세수 증가세 역시 꺾일 때가 온다. 그때 우리 경제가 얼마나 덜 흔들리고 또 다른 성장동력을 갖고 있느냐가 지금의 호황을 진짜 승리로 만들 핵심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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