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한국의 제조업은 정말 강한가

  • 1등 공장 짓고도 'AI 두뇌'는 셋방살이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한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제조 강국이라 불러왔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배터리, 철강 어느 분야를 놓고 봐도 세계 정상급 기업을 갖춘 나라는 흔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힘은 제조업’이라는 말을 신조처럼 되뇌어왔다.

지난 8월 30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열린 한·일 저출산 대응 심포지엄에서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저출산과 인구절벽이라는 두 나라 공통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아예 ‘경제공동체’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양국 청년이 국경을 넘나들며 일하고 배우며 자격과 경력을 서로 인정받도록 하고, 관광에 머물러 있던 지역 교류를 산업과 경제 전반으로 넓히며, 돌봄 로봇과 의료 AI 같은 첨단기술을 함께 실증하고 표준을 세워 인력 부족의 부담을 덜자는 구상이었다. 비용을 나누고 시장을 합쳐 더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필자는 최태원 회장의 이 발표를 보면서 문득 'AI 시대에 한국의 제조업은 진정 강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일수록 산업의 체력을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절박해지기 마련이고, 그 답의 상당 부분은 결국 제조업이 AI 시대에도 얼마나 대체불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일본의 대표 종합경제지 『Voice』 8월호를 읽으면서 이 물음은 한층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됐다. 특집 제목은 '주가(株價) 신시대, 산업의 행방'. AI에서 에너지, 자동차, 반도체, 우주에 이르기까지 일본 산업의 미래를 폭넓게 짚은 글이었는데 핵심은 단순한 주가 상승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계 경제가 산업을 평가하는 잣대 자체를 바꾸면서 그동안 저평가돼 온 일본의 산업 자산을 다시 봐야 한다는 '재평가'의 목소리였다.

이 질문을 그대로 우리에게 돌려보면 어떨까. 필자는 이 질문 앞에서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웠다. 한국 제조업이 갑자기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현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산업의 강약을 재는 저울추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하기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곱하기다

지난 30년, 좋은 제조업의 기준은 명료했다. 더 싸게,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 팔면 그만이었다. 생산성과 가격경쟁력, 시장점유율과 수출액이 산업경쟁력을 재는 대표적 잣대였다. 그러나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며 공급망의 지형이 통째로 흔들렸다. 여기에 AI 혁명이 겹쳤다. 이제 산업의 가치는 가격과 생산량만으로 매겨지지 않는다. 핵심 기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가, 공급망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자리를 차지하는가, 충분하고 값싼 전력을 확보하고 있는가, 데이터를 쌓아 AI로 전환할 역량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산업의 등급을 새로 매긴다.

과거의 경쟁력 방정식이 '기술+자본+노동+가격'의 더하기였다면, AI시대의 방정식은 '기술×AI×데이터×에너지×공급망×안보'의 곱하기에 가깝다. 더하기와 곱하기의 차이는 크다. 더하기는 어느 하나가 약해도 다른 것으로 메울 수 있지만 곱하기는 어느 한 항목이 0에 가까우면 전체 값이 무너진다. 이 새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익숙했던 한국 제조업의 초상화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적인 공장은 있다, 그러나 그 공장의 '머리'는 누구 것인가

한국 제조업의 가장 큰 자산은 공장 그 자체다. 반도체 팹부터 자동차·배터리·조선소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현장이 이렇게 밀집한 나라는 드물다. 이는 생성형 AI를 넘어 '몸을 가진 AI', 즉 피지컬 AI의 시대에는 대단한 자산이다. 로봇이 움직이고 자동차가 달리고 반도체가 수천 개 공정을 거치는 그 현장에서 현실 세계의 방대한 데이터가 매 순간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장들은 어찌 보면 거대한 '현실 세계 AI 학습장'인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데이터를 누가 지배하는가. 공장을 최적화하는 산업용 소프트웨어는 누가 만드는가. AI 모델과 클라우드, 설계 도구, 디지털 트윈, 로봇의 운영체제는 누구의 것인가.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지만 그 공장을 움직이는 핵심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은 상당 부분 해외 기업에 기대고 있다. 하드웨어는 강하고 소프트웨어는 약한, 이른바 '강한 몸, 약한 머리'의 구조다.

AI가 공장의 보조수단에 머물 때는 이 정도 간극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AI가 공장의 '머리'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공장은 우리 땅에 있는데, 그 공장의 지능과 데이터에서 나오는 고부가가치는 다른 나라 기업의 몫이 되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제조업에 켜진 첫 번째 경고등이다.

챔피언 기업은 많다, 챔피언 생태계는 있는가

두 번째 문제는 경쟁력이 소수의 대기업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공장에 들어서면 분명 세계 최첨단이다. 그러나 공급망을 따라 2차, 3차 협력업체로 내려가 보면 자동화와 데이터 활용, AI 도입 수준의 격차는 눈에 띄게 벌어진다.
AI 시대에는 이 격차가 더 치명적이다. 대기업 하나가 AI 전환에 성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국가 전체의 생산성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수천 개의 협력기업이 함께 달라져야 비로소 산업 전체의 체질이 바뀐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챔피언 기업' 전략은 이제 '챔피언 생태계' 전략으로 옮겨가야 한다. 몇 개의 세계적 기업을 가진 나라에서, 세계적인 산업생태계를 가진 나라로 갈 수 있느냐—. 이것이 앞으로의 승부처다.

일본이라는 거울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이미지 탓에 제조업까지 함께 쇠퇴한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AI와 경제 안보의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 소재·장비, 정밀부품, 산업용 로봇 등 일본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산업 자산의 전략적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다.

한·일 제조업을 다소 거칠게 대비하자면, 일본은 깊이(Depth)의 나라이고 한국은 속도(Speed)의 나라다. 일본은 소재에서 부품, 장비, 정밀기계로 이어지는 산업의 계층이 매우 두텁다. 한국은 과감한 투자 결정과 대규모 양산, 세계시장 진입의 속도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깊이도 속도도 그 하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국의 지능(Intelligence), 중국의 규모(Scale), 일본의 깊이, 한국의 속도가 서로 경쟁하고 뒤엉키면서 새로운 산업 질서를 짜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조선도 있으니 제조업은 걱정 없다"는 안도는 위험하다. 세계 산업 패권의 경쟁 단위가 이미 개별 제품에서 AI와 제조업이 결합된 생태계 전체로 옮겨가고 있는 까닭이다.

뒷전에 있던 변수, 전력

AI 제조강국을 논하면서 전력을 빼놓을 수는 없다. 반도체 팹도, AI 데이터센터도, 배터리 공장도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산업 입지를 결정짓는 기준은 인건비나 땅값을 넘어 얼마나 충분하고 안정적이며 경쟁력 있는 가격의 저탄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GPU(그래픽처리장치)를 확보하고 반도체 공장을 짓고 데이터센터를 유치해도 전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염불이다. 산업정책과 에너지정책을 더 이상 따로 설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성적표는 대체불가능성

그렇다면 한국 제조업의 새 성적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수출액이나 시장점유율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대체불가능성(Indispensability)'을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가 한국산 HBM(고대역 메모리) 없이 AI 서버를 만들 수 있는가. 한국의 조선소 없이 LNG선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산업정책의 목표도 달라진다. 시장점유율 1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기술과 생산능력을 한국에 쌓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만 그 대체불가능성이 해외의 AI와 소프트웨어에 지나치게 기대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전략 자산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정부는 판을 만들고, 기업은 가치를 만들라.

일본 『Voice』가 산업 재평가 끝에 내놓은 처방 중 하나가 '공격적인 산업정책'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공격성은 보조금이나 보호가 아니라 '선점'을 뜻한다. 쇠퇴한 산업을 뒤늦게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산업에 필요한 시장과 기술, 인프라와 인재를 정부가 기업보다 한발 앞서 준비하는 일이다. 산업정책의 동사가 이제 보호(Protect)에서 구축(Build)으로, 그리고 선도(Lead)로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판을 깔았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그 다음은 기업의 몫, 즉 '새로운 가치창조'다.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더 많이 파는 것만으로는 AI 시대의 높은 부가가치를 잡을 수 없다. 물류에 AI를 결합해 수요를 예측하면 물류는 비용센터에서 가치창조의 플랫폼으로 바뀐다. 자동차에 소프트웨어와 자율주행, 모빌리티 서비스를 엮으면 자동차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만드는 플랫폼이 된다. 기업의 경쟁방식이 이제 제조(Make)에서 연결(Connect)을 거쳐 창조(Create)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지금이 바로 그 절대적인 시점이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놀랄 만한 제조 강국을 일궈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경쟁력을 저절로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한국 제조업은 강한가"가 아니다. "AI 시대에도 세계가 한국의 제조업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만들 수 있는가" —. 여기에 답해야 한다.

한국 제조업의 진짜 위기는 약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강하다는 믿음 때문에 변화의 때를 놓치는 데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희망도 바로 거기에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현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지금, 정부가 미래 산업의 판을 제대로 짜고 기업이 그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면 한국은 단순한 제조강국을 넘어 AI 시대의 '대체불가능한 제조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 가능성이 아직 우리 손 안에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바로 지금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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