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은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이 문을 닫은 지 35년이 되는 날이다. 유엔이 정한 핵실험 반대 국제의 날이기도 하다. 카자흐스탄이 제안해 만들어진 기념일이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핵실험을 한 나라는 북한이다. 2017년 9월 3일, 6차 실험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핵실험이 관측되지 않았다. 당시 폭발을 감지한 국제 감시망에는 세미팔라틴스크가 있던 그 땅에 세운 관측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실험장에서는 1949년부터 1989년까지 456번의 핵폭발이 있었다. 지하에서 340번, 지상과 공중에서 116번이다. 1945년 이후 여덟 개 국가가 실시한 핵실험을 모두 합치면 2,056번인데, 그중 5분의 1이 넘는 실험이 이 한 곳에서 진행됐다. 실험장 넓이는 18,000제곱킬로미터로 경상북도와 비슷하다.
소련은 1947년 이 땅을 실험장으로 선정한 이유로 사람이 살지 않는 점을 꼽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폭심에서 수십 킬로미터 안에 마을이 여럿 있었다. 초기 시설을 지은 인력은 수용소에서 데려왔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실험장이 문을 닫고 나서야 알려졌다. 소련 당국이 수십 년 동안 은폐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전문가들은 실험장 운영 기간 동안 약 150만 명이 방사성 낙진에 노출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폐쇄 후 진행된 보건 연구들은 건강에 직접 영향을 받은 주민을 20만 명가량으로 집계했다. 여러 종류의 암과 갑상선 질환이 눈에 띄게 많았다.
침묵을 깬 것은 글라스노스트와 시민운동이었다. 카자흐 시인 올자스 술레이메노프가 1989년 2월 네바다-세미팔라틴스크 운동을 꾸렸다. 자기 나라 실험장과 미국 실험장 이름을 나란히 내건 이름이었다.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소련에서 처음 나온 대중적 반핵 운동이 됐다. 세미팔란티스크의 마지막 핵실험은 그해 10월 19일에 진행됐다.
폐쇄 명령서에는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1991년 8월 29일 서명했다. 소련이 이 초원에서 첫 원자폭탄을 터뜨린 1949년 8월 29일부터 꼭 42년이 되는 날이었다. 독립은 넉 달 뒤여서 그의 직함은 아직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대통령이었고, 모스크바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
소련 붕괴 후 카자흐스탄은 물려받은 세계 4위 규모의 핵무기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후에는 이 경험을 외교 무대에서 활용했다. 2002년 5월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을 비준했고, 폐쇄 15주년이 되는 2006년에는 중앙아시아 비핵지대 조약 서명식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열었다. 2009년 12월 유엔 총회가 결의 64/35를 만장일치로 채택하면서 8월 29일이 핵실험 반대 국제의 날이 됐다.
오염된 땅을 되돌리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데겔렌 산악지대의 갱도와 시추공에 핵분열물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소련이 무너진 뒤 사실상 방치돼 그 시기의 가장 위험한 핵 안보 구멍으로 꼽혔다.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미국 과학자들이 17년 동안 갱도를 메우고 특수 콘크리트를 부어 폐기 플루토늄을 가뒀다. 1억 5000만 달러가량이 든 이 작업은 대부분 비공개로 진행돼 2012년 10월에 마무리됐다.
지금 이 땅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카자흐스탄에는 핵실험금지조약이 지켜지는지 확인하는 국제감시체제(IMS) 시설이 다섯 곳 있다. 마칸치에 주 지진관측소가 있고, 세메이에서 120킬로미터 떨어진 쿠르차토프에도 보조 관측소를 뒀다. 2013년 2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을 때 마칸치 관측소는 진동을 잡아내 빈의 국제데이터센터로 자료를 보냈다. 카자흐스탄은 2008년 이 기구의 대규모 현장사찰 훈련도 치렀다.
한국은 이 조약의 당사국이다. 북한은 여섯 차례 핵실험을 하는 동안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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