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오디세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이야기]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 3000년 전 호메로스가 던진 질문, 크리스토퍼 놀란이 AI 시대에 다시 묻다

영화 한 편이 세계를 다시 3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바다로 불러들이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다. 영화가 공개된 뒤 세계 주요 도시의 극장은 관객들로 붐비고,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 트로이 전쟁과 서양철학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영화평론가뿐 아니라 역사학자와 철학자, 작가와 일반 관객까지 저마다 자신의 언어로 이 영화를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도 하나의 ‘오디세이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약 3000년 전의 이야기가 21세기 최첨단 영화기술을 만나 다시 세계 대중문화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임에서도 IMAX 영화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이 영화를 보기까지 한다. 유명 영화평론가를 초청해 해설도 듣는다. 영화를 본 뒤에는 여러 평론과 감상을 찾아 읽기도 한다. 역사학자는 역사와 신화를 이야기했고, 철학자는 인간과 운명을 읽었으며, 영화평론가는 놀란의 연출과 영상언어를 분석했다. 모두 의미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설명을 많이 듣고 글을 많이 읽을수록 오히려 처음 스크린 앞에서 가슴에 남았던 하나의 질문은 더욱 선명해졌다.

예술은 반드시 하나의 정답으로 환원되어야 하는가. 영화 역시 감독의 손을 떠나는 순간 관객 각자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가족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전쟁을 떠올리며,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청춘과 실패, 사랑과 기다림을 돌아본다. 훌륭한 예술은 스크린의 불이 꺼지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

《오디세이》가 우리에게 던진 가장 강렬한 질문도 의외로 단순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걸어 나왔으며, 이제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앞에서 다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놀란의 영화는 고대의 신화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지만, 그 질문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인류가 우주선을 태양계 밖으로 보내고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학습하는 AI를 만들어낸 오늘에도 우리는 결국 호메로스의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위대한 까닭은 단순히 오래된 작품이라는 데 있지 않다. 제국이 흥망하고 왕조가 사라졌으며, 종교와 철학이 태어나고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을 지나 인공지능의 시대까지 왔지만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좋은 고전은 과거를 박제해 보존하는 책이 아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래서 고전에는 나이가 없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것은 그리스 영웅의 지중해 항해였지만 그 항해에는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배신, 교만과 절제, 전쟁과 평화, 유혹과 책임, 죽음과 귀향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가 들어 있다.

놀란이 붙잡은 것도 결국 신화 뒤에 있는 인간이다. 오디세우스는 영웅이지만 완전한 영웅은 아니다. 그는 강하지만 흔들리고, 지혜롭지만 실수하며, 용감하지만 두려워한다. 때로는 자신의 재능과 승리에 도취해 교만해지고, 그 교만 때문에 자신과 동료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삶에서는 길을 잃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났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상을 이기고도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 문명을 건설하고도 행복하지 못하는 인간, 엄청난 지식을 축적하고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3000년 전 오디세우스와 AI 시대의 우리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바로 이 거대한 신화적 세계를 현대의 영화 언어로 다시 불러낸 작품이다. 놀란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토대로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길고 험난한 귀향을 그린다. 주인공 오디세우스 역은 맷 데이먼, 아들 텔레마코스는 톰 홀랜드, 아내 페넬로페는 앤 해서웨이, 페넬로페의 구혼자 안티노오스는 로버트 패틴슨이 맡았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젠데이아, 칼립소는 샤를리즈 테론, 키르케는 서맨사 모턴, 메넬라오스는 존 번설, 아가멤논은 베니 사프디, 충직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는 존 레귀자모, 오디세우스의 부하 에우리로코스는 히메시 파텔, 시논은 엘리엇 페이지가 연기한다.


1.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

전쟁에서 이겼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남자. 이야기의 중심에는 오디세우스(Odysseus·맷 데이먼)가 있다.

그는 그리스 서쪽의 작은 섬나라 이타카(Ithaca)의 왕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단순히 칼을 잘 쓰는 전사가 아니다. 《오디세이아》의 수많은 영웅 가운데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힘보다 지혜와 꾀, 판단력과 언어의 능력이다. 아킬레우스가 힘을 대표하고 헥토르가 명예와 책임을 상징한다면, 오디세우스는 생각하는 인간을 대표한다.

그가 집을 떠난 것은 트로이 전쟁 때문이었다.

아내 페넬로페(Penelope·앤 해서웨이)와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톰 홀랜드)를 이타카에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난다. 그 전쟁이 무려 10년이나 계속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고 그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다시 거의 10년이 걸린다.

따라서 《오디세이아》의 핵심을 가장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한 남자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10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10년을 떠돈 이야기다.

그러나 그 20년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터를 떠난 영웅이 수많은 유혹과 공포와 죽음을 지나 다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트로이 전쟁 10년 동안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성벽은 견고했고 트로이군의 저항도 강했다. 이때 전쟁을 끝낼 결정적인 계략이 등장한다.

트로이 목마(Trojan Horse)다.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들어 그 안에 오디세우스를 포함한 그리스 정예병들을 숨긴다. 그리고 그리스군은 마치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처럼 위장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거대한 목마를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성 안으로 끌어들인다.

밤이 된다. 트로이 시민들이 승리를 축하하고 잠든 사이 목마 속의 그리스 병사들이 나온다. 성문을 열고 밖에 숨어 있던 그리스군을 불러들인다. 난공불락의 트로이가 무너진다.

놀란의 영화에도 이 거대한 트로이 목마와 시논(Sinon·엘리엇 페이지)이 등장한다. 시논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로마 전승,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목마를 트로이 성 안으로 들이도록 속이는 인물로 자세히 전해진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진짜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배에 오른다. 목적지는 단 하나다.

이타카.

그곳에는 오랜 세월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다. 그러나 지중해는 그를 쉽게 돌려보내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는 특히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분노가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다. 놀란은 이러한 신들의 직접적인 개입을 상당 부분 자연현상과 인간의 기억, 죄책감과 내면의 문제로 옮겨놓는다. 바로 이 차이가 오히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라는 이 영화의 현대적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지혜와 오만
가장 유명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키클롭스(Cyclops), 즉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와의 만남이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거대한 동굴에 들어간다. 그곳에는 양과 염소, 치즈와 음식이 있다. 그러나 동굴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였다. 그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동굴에 가두고 거대한 돌로 입구를 막아버린다. 그리고 붙잡힌 선원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여기서 오디세우스의 무기가 등장한다.

지혜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 그는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먹이고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의 말로 속인다. 거인이 술에 취해 잠들자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달군 나무 말뚝으로 그의 하나뿐인 눈을 찌른다. 폴리페모스가 고통스럽게 외치지만, 다른 키클롭스들은 ‘아무도’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힘이 아니라 언어와 지략으로 살아남는다.

놀란의 영화는 폴리페모스와의 대결을 살리면서도 이 유명한 ‘아무도 아니다’라는 언어유희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전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안전한 곳까지 달아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진짜 이름을 외쳐버린다. 자신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임을 밝힌 것이다.

그것이 실수였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눈을 멀게 한 오디세우스에게 포세이돈의 분노가 쏟아진다. 영웅의 지혜가 그를 살렸지만 영웅의 오만이 다시 그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키르케―인간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
오디세우스 일행은 다시 바다를 떠돌다가 마법의 여인 키르케(Circe·서맨사 모턴)가 사는 섬에 도착한다. 키르케는 아름답고 위험하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그녀는 인간을 짐승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에게 마법을 걸어 돼지로 만들어버린다. 이 장면은 《오디세이아》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인간이 이성과 절제를 잃고 욕망에 지배당하면 짐승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전에서는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은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마법을 이겨내고, 결국 동료들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게 한다. 그는 키르케의 섬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놀란의 영화는 이 대목을 보다 압축적으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인간이 왜 계속 머무르고 흔들리는가.

《오디세이아》가 위대한 이유는 주인공을 완벽한 성인으로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 역시 욕망하고, 흔들리고, 실수한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떠난다. 영웅이어서 인간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때문에 인간적인 영웅인 것이다.

저승으로 내려간 오디세우스―죽은 자들에게 길을 묻다.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죽은 자들의 세계까지 찾아간다. 원전에서는 그곳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iresias)의 영혼을 만나 자신이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영혼도 만난다.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전쟁과 바다를 떠도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고 죽었다. 이 순간부터 그의 귀향은 더욱 절박해진다.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세이렌―인간을 죽음으로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다음에는 세이렌(Sirens)이 기다린다. 세이렌의 노래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 노래에 홀린 선원은 이성을 잃고 파멸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는다. 그러나 자신은 그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배의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아무리 풀어달라고 외쳐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한다.

노래가 들려온다. 오디세우스는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풀어달라고 외친다. 그러나 부하들은 명령대로 그를 묶어둔다. 배는 세이렌의 바다를 통과한다.

이것은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욕망과 자기 통제의 장면 가운데 하나다. 오디세우스는 욕망을 없애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욕망에 굴복하지 않을 장치를 미리 만들어놓았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어느 쪽을 선택해도 희생이 따른다.이번에는 더 잔인한 선택이 기다린다.

한쪽에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스킬라(Scylla)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배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Charybdis)가 있다.양쪽 모두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지도자의 비극이기도 하다. 완벽한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더 큰 파멸을 피하기 위해 일부 희생을 감수하는 길을 택한다. 여섯 명의 동료가 스킬라에게 희생된다.

영웅은 살아남지만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그래서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승승장구하는 영웅이 아니다. 귀향에 가까워질수록 더 외로운 인간이 된다.

칼립소―영원한 생명보다 집을 선택하다.
마침내 오디세우스는 거의 모든 동료를 잃고 혼자가 된다. 그리고 칼립소(Calypso·샤를리즈 테론)가 사는 오기기아섬에 표류한다. 영화에서도 칼립소와 오디세우스의 관계는 주요한 축으로 제시된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붙잡아두고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 그에게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설 가능성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넬로페에게 돌아가고 싶다. 아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바로 여기에서 《오디세이아》의 가장 깊은 인간적 주제가 모습을 드러낸다.영원히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인간으로 사는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

이타카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타카는 평온하지 않았다. 왕이 20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귀족이 왕궁으로 몰려와 페넬로페에게 청혼한다. 그들은 페넬로페와 결혼하면 이타카의 왕권까지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가장 위험한 인물이 안티노오스(Antinous·로버트 패틴슨)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 그녀는 지혜를 발휘한다.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다 짜면 결혼할 사람을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낮에는 베를 짠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에 짠 것을 몰래 다시 풀어버린다. 그렇게 시간을 번다.

이것이 바로 ‘페넬로페의 베 짜기’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괴물과 싸웠다면 페넬로페는 왕궁에서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그녀 역시 또 하나의 오디세우스다.

아들 텔레마코스―아버지를 찾아 나선 소년.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성장한다. 텔레마코스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그는 어린아이였다. 이제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왕궁은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며 어머니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구혼자들에게 점령당해 있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찾아가 아버지의 소식을 묻는다. 특히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Menelaus·존 번설)와 헬레네를 만난다.

《오디세이아》의 앞부분이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인 것은 중요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고,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집 밖으로 나간다.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마침내 한 지점에서 만난다.

이것은 단순한 부자 상봉이 아니다.한 소년이 아버지 없이 성장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성인이 되는 이야기다.


마침내 이타카―왕이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끝에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 돌아온다. 하지만 왕의 모습으로 입성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초라한 거지의 모습으로 왕궁에 들어간다. 누가 충성했고 누가 배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원전에서 그를 알아보는 존재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존재가 늙은 개 아르고스(Argos)다. 주인이 떠난 뒤 오랜 세월을 기다린 아르고스는 초라하게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알아본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죽는다.

왕궁에서는 마지막 시험이 시작된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에게 오디세우스의 활을 당겨 화살을 도끼 자루의 구멍들 사이로 통과시키는 남자를 선택하겠다는 시험을 제시한다.

구혼자들이 차례로 활을 들어본다. 아무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마침내 초라한 거지가 활을 잡는다.그가 바로 오디세우스다.

활이 당겨진다. 화살이 날아간다. 그리고 왕의 귀환과 복수가 시작된다.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힘을 합쳐 왕궁을 차지한 구혼자들을 제압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으로 같은 전선에 선다.

페넬로페의 마지막 확인―원전의 침대, 영화의 황금 핀. 호메로스의 원전에서는 그렇다고 모든 것이 바로 끝나지 않는다. 페넬로페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자신의 남편인지 확인해야 한다.

20년이다.얼굴도 변했다. 몸도 변했다. 사람도 변했다.그래서 마지막 시험을 한다.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부부의 침대에 관한 비밀을 꺼낸다. 그 침대는 살아 있는 올리브 나무를 기둥 삼아 오디세우스가 직접 만든 것이어서 함부로 옮길 수 없다. 오디세우스만이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순간 페넬로페는 확신한다.눈앞의 남자는 정말 자신의 남편이다.

놀란은 이 유명한 원전의 장면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페넬로페가 오래전 오디세우스에게 건넸던 황금 아테나 핀이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중요한 증표가 된다.원전과 영화는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전쟁도 끝났다. 항해도 끝났다. 괴물과의 싸움도 끝났다. 그리고 한 인간이 마침내 자신이 돌아가야 할 사람 앞에 돌아왔다.

《오디세이》는 결국 ‘귀향’의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귀향은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전쟁의 영웅이 남편으로, 전사가 아버지로, 신과 겨루던 존재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2. 트로이 전쟁 이야기

《오디세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앞의 트로이 전쟁을 알아야 한다. 왜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 갔는가. 왜 그리스의 수많은 왕과 영웅이 트로이까지 원정했는가. 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죽었는가.

신화적 전승에서 그 시작에는 한 번의 결혼식과 한 개의 황금 사과가 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이다. 많은 신이 초대받았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는 초대받지 못한다.

분노한 에리스는 연회장에 황금 사과 하나를 던진다.

사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세 여신이 나선다. 신들의 여왕 헤라(Hera),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결국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에게 선택을 맡긴다. ‘파리스의 심판’이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각자 보상을 약속한다. 헤라는 권력과 왕국을,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한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한다.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Helen)가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Menelaus)였다. 그럼에도 파리스는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간다. 고대의 여러 전승에 따라 헬레네가 납치됐는지, 파리스를 따라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메넬라오스에게는 명백한 치욕이었다. 그는 형 아가멤논(Agamemnon)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케네의 강력한 왕이자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그리스의 영웅들이 트로이로 모인다. 가장 강한 전사 아킬레우스(Achilles), 지략의 왕 오디세우스(Odysseus),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 거대한 전사 아이아스(Ajax), 노련한 왕 네스토르(Nestor), 그리고 총사령관 아가멤논.

이들이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에게해를 건너 트로이로 향한다.

반대편 트로이에는 또 다른 영웅들이 있다.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Priam), 왕비 헤카베(Hecuba), 왕자 파리스, 그리고 무엇보다 트로이 최고의 전사이자 파리스의 형인 헥토르(Hector)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두 사람이다. 그리스에는 아킬레우스가 있고, 트로이에는 헥토르가 있다.

두 사람의 대결이 트로이 전쟁 최고의 비극을 만든다.

아킬레우스―가장 강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전사.

아킬레우스는 거의 무적의 전사다. 그의 어머니는 여신 테티스다. 후대에 널리 알려진 전승에서는 테티스가 어린 아킬레우스를 저승의 강 스틱스에 담가 불사의 몸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발뒤꿈치를 잡고 물에 담갔기 때문에 그 부분만 물에 닿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아킬레스건(Achilles’ heel)’, 즉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표현이 남았다.

다만 이 유명한 ‘발뒤꿈치’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직접 등장하는 설정은 아니다. 후대의 신화 전승에서 발전한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은 10년이나 이어진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전쟁 10년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한 작품이 아니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으로 주어진 여인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아킬레우스의 자존심이 무너진다. 그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가 전쟁에서 빠진다.전세가 뒤집힌다.트로이의 헥토르가 그리스군을 거세게 몰아붙인다.

아킬레우스의 가장 가까운 동료 파트로클로스(Patroclus)는 더 이상 그리스군의 희생을 보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간다. 트로이군은 아킬레우스가 돌아온 줄 알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결국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를 죽인다. 그 소식을 들은 아킬레우스가 무너진다.분노는 이제 아가멤논이 아니라 헥토르를 향한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갑옷을 입는다. 전쟁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진다.

헥토르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게는 아내 안드로마케(Andromache)와 어린 아들이 있다. 그럼에도 도망칠 수 없다. 그는 트로이의 왕자이고 도시를 지켜야 하는 전사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트로이 성벽 앞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맞선다.결과는 헥토르의 죽음이다.분노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닌다. 승리했지만 인간성을 잃어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일리아스》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찾아온다.

헥토르의 아버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밤중에 몰래 적진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 앞에 늙은 왕이 무릎을 꿇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아킬레우스는 눈앞의 늙은 왕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두 사람이 운다. 한 사람은 아들을 잃었고, 다른 사람은 친구를 잃었다. 적과 적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인간으로 마주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준다.

《일리아스》는 바로 이 인간적인 장면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된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결국 파리스가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아폴론이 그 화살을 이끌었다는 전승도 있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가 사라진다.그래도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는다.

이때 오디세우스의 지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힘으로 안 되면 생각으로 싸워야 한다.

거대한 목마를 만든다. 자신을 포함한 정예병들이 그 안에 숨는다. 시논이 트로이 사람들을 속여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Laocoön)은 그리스인이 남긴 선물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간다.밤이 찾아온다.트로이 시민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고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목마가 열린다.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병사들이 나온다. 성문이 열린다. 그리스군이 밀려 들어온다.

10년을 버틴 트로이가 무너진다.승자는 있었지만 행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트로이는 불탄다. 프리아모스 왕은 죽는다. 트로이 왕실은 무너진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포로가 된다. 헥토르도 죽었고 아킬레우스도 죽었다. 파리스 역시 죽는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도, 전쟁을 막으려 했던 사람도,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도 죽는다.

그리스가 승리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진정한 승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가멤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와 그녀의 연인 아이기스토스가 꾸민 복수 속에서 살해된다. 전승과 비극 작품마다 세부 묘사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쟁의 총사령관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광스러운 개선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이었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도 험난한 귀환을 겪는다. 수많은 병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기나긴 귀향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지략의 영웅은 이제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의 앞에는 폭풍과 키클롭스, 키르케, 세이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칼립소, 죽음과 유혹이 기다리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승리가 아니다. 왕국을 넓히는 것도 아니다.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로 이어지면서도 전혀 다른 인간의 세계를 보여준다.

《일리아스》가 전쟁의 이야기라면 《오디세이아》는 귀향의 이야기다. 《일리아스》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를 통해 영웅은 어떻게 죽는가를 묻는다면,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아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가를 묻는다.

아킬레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명예다. 헥토르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귀환이다. 페넬로페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림과 신뢰다. 텔레마코스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이다.

그리고 그들 위에는 제우스, 아테나, 포세이돈,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도 신들의 다툼에서 시작된다. 바람도 신이 일으킨다. 바다도 신이 막는다. 승리와 패배에도 신이 개입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신이 아니다.인간이다.

오랜 세월을 기다린 페넬로페가 있고, 아버지 없이 성장한 텔레마코스가 있고, 수많은 동료를 잃고 늙고 상처 입은 몸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두 대서사를 하나의 거대한 문명사적 이야기로 읽으면 놀라운 흐름이 나타난다.

신들의 싸움에서 인간의 전쟁으로, 인간의 전쟁에서 한 인간의 귀향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이것이 약 3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인류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잊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2026년 《오디세이》가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온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더 빨리 계산하며 인간의 언어와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디세우스에게 그것은 완벽함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했고, 자만했고, 유혹에 흔들렸으며, 수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잊지 않았다.

이타카.

그곳에는 왕좌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고, 성장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었으며,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공동체가 있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승리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데 있지 않다.트로이를 무너뜨린 것이 영웅 오디세우스의 승리였다면, 이타카로 돌아온 것은 인간 오디세우스의 승리였다.

바로 그 순간 이야기는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넘어온다.

그래서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이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하나의 거대한 인간학적 이동이다. 힘에서 지혜로, 정복에서 귀환으로, 전쟁에서 생활로, 영광에서 책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던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기 시작하는 세계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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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챗GPT 생성


3. 크리스토퍼 놀란, 평생 인간을 찍어온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보면 그가 왜 결국 호메로스에게까지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놀란은 처음부터 인간을 찍어왔다.

다만 인간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기억과 꿈, 시간과 우주, 전쟁과 과학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통과해 인간에게 접근했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이 무너진 인간의 정체성을 물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나’는 여전히 나인가.

《인셉션》에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흔들며 인간의 무의식과 기억, 죄책감을 하나의 영화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질문과도 만나는 세계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블랙홀, 시간과 우주라는 거대한 현대물리학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었다.

《덩케르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을, 《테넷》에서는 시간의 방향과 선택을 탐구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에서는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과학적 성취가 인류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힘, 핵무기로 변했을 때 과학자와 문명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를 물었다.

영화마다 외형은 다르지만 그 밑을 흐르는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이 흔들릴 때 인간은 무엇인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 인간은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도 사랑은 무엇인가. 인간이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제 놀란은 거의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신과 괴물 사이를 떠도는 인간에게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인간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는 놀란의 새로운 출발이면서 동시에 그가 평생 찍어온 영화들의 원점처럼 보인다. 시간을 찍어도 결국 인간이고, 우주를 찍어도 인간이며, 전쟁을 찍어도 인간이고, 과학을 찍어도 인간이다. 그리고 신화를 찍은 뒤 마지막에 남는 것 역시 인간이다.

그의 영화가 아무리 거대해져도 결론은 자꾸 작은 곳으로 돌아온다. 《인터스텔라》가 우주 끝까지 갔다가 아버지와 딸에게 돌아왔다면,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라는 인류 최대의 힘을 다룬 끝에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 남겼다. 《오디세이》 역시 신과 괴물, 전쟁과 대양을 거느린 끝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인간을 남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린다. 낯선 세계에 들어선 치히로의 부모는 주인 없는 음식 앞에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채 탐식하다 돼지로 변한다. 《오디세이아》에서도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다.

두 작품의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차용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수천 년의 시간과 지중해와 일본이라는 엄청난 공간적 거리를 넘어 비슷한 인간학적 상징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욕망의 주인이기를 멈추고 욕망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순간 인간성을 잃는다는 통찰이다.

이것이 고전의 힘이다. 고전은 그대로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 속 인간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4.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우리가 《오디세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읽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고대 신화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삶에 신들이 깊숙이 개입한다. 제우스가 질서를 주재하고 포세이돈이 바다를 뒤흔들며 아테나가 인간을 돕는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움직인다. 인간은 신보다 약하며 운명보다 작은 존재다.

그런데 《오디세이아》를 따라가다 보면 그 신들의 세계 안에서 인간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오디세우스는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한다. 실수하고 그 대가를 치르고, 다시 생각한 뒤 다시 선택한다. 운명은 존재하지만 인간 역시 그 운명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남긴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신을 없앤 데 있지 않다. 신들의 세계 안에서도 인간에게 생각할 권리와 선택할 책임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천둥을 보면서 신의 분노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왜 천둥이 치는지 묻기 시작했다.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 신화에서 철학으로, 주어진 설명에서 스스로 질문하는 사유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 철학이 《오디세이아》 한 작품에서 직접 태어났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서사가 인간의 성격과 운명, 선택과 책임을 깊이 탐구했다는 점에서 이후 그리스 철학이 성장할 정신적 토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지면서 인간은 세계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도 돌렸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은 3000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AI가 등장하면서 더욱 절박해졌다.

AI는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학습하고 글과 그림, 음악과 영상을 만들며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다. 로봇과 결합한 피지컬 AI는 인간의 육체노동 영역으로까지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증기기관이 인간의 근육을 확장하고 컴퓨터가 계산 능력을 확장했으며 인터넷이 정보의 연결 범위를 넓혔다면, AI는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겼던 언어와 추론, 창작과 판단의 일부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질문은 더 근본적으로 바뀐다.

AI가 인간처럼 글을 쓰는 시대에 인간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AI가 그림과 음악을 만드는 시대에 인간의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AI가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을 보조하는 시대에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더 빠르게 계산하는 시대에 인간의 지혜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의 일부를 오디세우스에게서 본다.

AI는 이타카까지 가는 가장 빠른 항로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이타카로 돌아가야 하는지까지 대신 결정해줄 수는 없다.

AI에는 기다리는 페넬로페가 없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텔레마코스도 없다. 알고리즘에는 고향이 없다.

목적지를 계산하는 것과 삶의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인간에게는 그 ‘왜’가 있다. 사랑하고, 책임지고, 기억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나의 의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5. 창백한 푸른 점, 인류 모두의 이타카

여기서 오디세우스가 항해했던 지중해를 떠나 잠시 우주로 시선을 돌려보자.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는 1990년 2월 14일 약 60억㎞ 떨어진 거리에서 지구를 촬영했다. 광대한 우주의 햇빛 속에서 지구는 한 픽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점으로 보였다.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위치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인류의 모든 역사가 벌어졌다.

트로이 전쟁도 그곳에서 일어났고 호메로스도 그 점 위에서 노래했다. 오디세우스가 목숨을 걸고 돌아가려 했던 이타카도 그 점 안에 있다. 예수가 걸었던 땅도,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던 곳도, 공자와 노자가 살았던 세계도, 20세기 한국의 독특한 종교사상가 다석 류영모가 하늘과 인간을 생각했던 자리도 모두 그 점 위에 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국과 종교, 혁명과 전쟁, 사랑과 증오, 성공과 실패가 우주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조그만 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창백한 푸른 점은 인간에게 두 가지 상반된 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인간은 우주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우주의 크기를 상상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지만 우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한다. 영원하지 않으면서 영원을 생각하고, 불완전하면서 완전을 꿈꾸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문명을 만들며 자신이 떠난 뒤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남긴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는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창백한 푸른 지구야말로 인류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가장 큰 이타카가 아닐까.

우리는 오랫동안 종교와 민족, 국경과 이념,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웠다. 그러나 우주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갈등도 하나의 작은 점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문화를 존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미사여구 이전에 이 조그만 행성에서 문명을 지속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독특한 종교사상가 다석 류영모가 떠오른다.

다석의 위대함은 여러 종교를 뒤섞어 하나로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기독교와 불교는 다르고, 유교와 도교 역시 다르다. 절대자와 인간, 구원과 깨달음, 세계와 생명을 이해하는 언어와 역사도 서로 다르다.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은 회통이 아니다.

다석의 회통은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른 경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에게 공통으로 던져지는 질문을 듣는 데 있었다.

그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다석은 성경을 깊이 읽으면서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을 함께 공부했다. 그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자아를 ‘제나’라고 부르고, 그것을 넘어 참된 자기와 더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존재를 ‘얼나’라는 독특한 우리말로 표현했다.

다석의 사상을 빌려 표현하면, 제나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오려 한다. 더 소유하고, 더 이기고, 더 높아지고 싶어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즉 탐진치와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반면 얼나를 향하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고 절제하며 자신을 넘어 더 큰 진리와 생명의 세계를 향한다.

그런 눈으로 보면 오디세우스의 항해 역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가 싸우는 키클롭스와 세이렌, 키르케와 폭풍은 바깥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도 내 안에 있고 교만도 내 안에 있으며, 분노와 두려움과 복수심도 내 안에 있다. 인간이 평생 싸워야 할 가장 강한 상대는 결국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를 향해 돌아가는 길은 욕망에 사로잡힌 ‘제나’에서 자신의 더 깊은 중심을 찾아가는 ‘얼나’로의 내면적 오디세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향한 이 본질적 질문을 만난다. 예수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려 한 사람이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살리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형식과 권력의 도구가 되었을 때 그 형식주의와 충돌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당시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으며, 나병환자를 만지고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종교적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그 규정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특히 통쾌하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이 길가에 있다. 종교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그를 지나가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경계했던 사마리아인이 멈춰 선다.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려가며 비용까지 지불한다.

중요한 질문은 누가 더 많은 율법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다.누가 쓰러진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가이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공동체의 정의와 신앙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반복된다. 신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는가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신앙의 진실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 역시 AI 시대에 새롭게 들린다.

자유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짓에서 자유로워지고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며 진실을 바라보고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더 깊은 자유에 도달한다.

AI가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서 진리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수많은 문장을 순식간에 생산한다고 해서 그 말의 도덕적 결과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고 진실을 선택하며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결국 인간에게 남는다.

불교의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역시 인간을 다른 방향에서 깨운다.

공(空)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어떤 존재도 홀로 영원불변의 독립적인 실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과 조건 속에서 존재한다는 통찰과 연결된다.

이른바 자성(自性)이 본래 공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오디세우스 역시 혼자서는 오디세우스일 수 없다. 페넬로페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고, 텔레마코스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다. 이타카가 있기에 왕이며 귀향자이고,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휘관이다.

인간 역시 가족과 친구, 사회와 국가, 역사와 문화, 자연과 지구,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세대와의 관계 속에서 지금의 ‘나’가 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또 다른 인간의 힘을 말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는 가르침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물이 오랜 세월 바위를 바꾼다.

인류는 강함을 너무 오랫동안 지배하고 정복하고 이기는 능력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노자는 낮아질 수 있는 힘, 다투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살리는 힘을 보여준다.

오디세우스 역시 힘과 지략만으로 이타카에 돌아간 것이 아니다. 왕이면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영웅이면서 마지막에는 거지의 모습으로 자기 왕궁에 들어간다.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때로는 물처럼 낮아질 줄 아는 것이 더 큰 힘일 수 있다.

《주역》의 거대한 정신은 변화다.

세상에 영원히 고정된 것은 없다. 낮이 밤이 되고 겨울이 봄이 되며, 흥한 것은 쇠하고 쇠한 것은 다시 일어난다. 인간도 기업도 국가도 문명도 변한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뜻이다.

AI 시대야말로 거대한 ‘역(易)’의 시대다. 직업이 바뀌고 기업이 바뀌며 언론과 교육도 바뀐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 자체가 바뀌고 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변화라면 무엇이든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기술과 제도는 바뀌어야 하지만 진실과 정의, 인간의 존엄, 자유와 책임, 생명에 대한 존중까지 기술의 속도에 떠밀려가서는 안 된다.

《중용》 역시 흔들리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중심을 지킬 것인지 묻는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인간의 본성과 길,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첫 구절이다. 중용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적당한 타협으로 이해하면 본뜻을 놓친다. 중(中)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마땅한 중심을 찾아가는 힘이다.

AI도 마찬가지다.

AI를 신처럼 숭배해서도 안 되고 악마처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기술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기술에 인간을 넘겨주어서도 안 된다.

사용하되 지배당하지 않고, 발전시키되 책임지며, 효율을 높이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는 것.

그것이 AI 시대에 새롭게 필요한 중용일 것이다.
서로 다른 경전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언어를 갖고 있다. 그것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석 류영모의 회통적 시선을 빌려 더 깊이 내려가 보면 공통의 인간학적 질문과 만난다.

무엇을 믿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고, 무엇을 아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며,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 못지않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6. 인간에게 필요한 두 번째 오디세이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는 줄곧 바깥을 향한 오디세이였다.

더 넓은 땅을 찾아 나섰고 더 큰 제국을 만들었다. 더 빠른 배와 철도,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었으며 지구 밖으로 우주선을 보냈다. 인터넷으로 세계를 연결했고 이제 인간 자신의 언어와 사고를 모방하는 AI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밖으로만 향하는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안으로 향하는 오디세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항해가 필요하다.

다석의 언어로 말하면 제나에서 얼나로 가는 길이다.

자기 욕망을 모두 실현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절제할 수 있을 때 더 큰 자유가 생긴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도 성공이다.

기계보다 많이 아는 인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인간, 기계보다 빠르게 계산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는 인간, 더 많이 생산하는 인간이 아니라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질문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AI가 강해질수록 인간의 외적인 능력보다 내적인 성숙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것은 기술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의 발전 속도에 걸맞은 인간의 윤리와 책임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만든 힘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적 성숙이 뒤처질 때 문명은 위험해진다.《오펜하이머》가 원자시대에 던졌던 질문이 AI 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AI는 사랑에 관한 세계의 모든 시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그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AI는 정의에 관한 수천 년의 철학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 앞에서 내가 침묵할 것인지 일어설 것인지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AI는 자유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AI는 기후위기가 초래할 위험을 계산할 수 있지만 오늘의 편리함을 조금 내려놓고 미래세대를 위해 자연을 지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AI는 이타카까지 가는 가장 빠른 항로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를 나의 이타카로 삼을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이고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이타카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이 말은 인간이 신을 몰아냈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 신이 되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자각하기 시작했다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 역시 인간이 져야 한다는 의미다.

자유가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고, 기술이 강해질수록 윤리도 강해져야 하며, 지식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겸손해져야 한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에 산다. 왕도 그곳에 있고 가난한 사람도 그곳에 있다.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결국 그 작은 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권력과 재산, 명예와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작은 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생각보다 단순한지도 모른다.

진실을 지키고, 정의를 선택하며, 자유를 사랑하되 책임지는 것.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에 다시 세워야 할 인간주의라고 생각한다. 기계보다 더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져야 한다.

3000년 전 호메로스는 한 인간을 바다로 내보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과 폭풍, 신과 괴물, 욕망과 유혹을 지나 마침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아니었다. 이타카라는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제국보다 소중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3000년 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오래된 인간을 다시 스크린 위로 불러냈다.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긴 항해가 끝나는 날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어쩌면 문명의 진보란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기억하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으며, 마지막에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 더 위대한 진보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게 그곳은 이타카였다. 다석 류영모에게는 제나를 넘어 얼나로 솟아나는 길이었다. 성경에서는 진리와 사랑의 길이고, 《반야심경》에서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공의 지혜이며, 노자에게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는 길이다. 《주역》에서는 변화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고, 《중용》에서는 세상의 극단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길이다. 칼 세이건의 우주적 시선으로 보면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창백한 푸른 점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할 이타카는 진리와 정의와 자유가 살아 있고, 인간과 문화와 자연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함께 숨 쉬는 세계여야 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류의 오디세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닮고, 로봇이 인간의 육체를 닮으며, 기계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인간을 물어야 한다.

무엇을 끝까지 인간에게 남겨두어야 하는가.
인간이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거대한 문명의 마지막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이 더 강한 인간, 더 많이 가진 인간, 더 빠른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진실한 인간, 더 정의로운 인간, 자유롭되 책임질 줄 아는 인간,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 자신과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인간, 자연과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인간, 그리고 자신이 광대한 우주 속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임을 아는 겸손한 인간에게 미래가 있을 것이다.

신화의 시대에 인간은 신들에게 길을 물었다. 철학의 시대에는 자신의 이성에 물었고 과학의 시대에는 자연의 법칙에 물었다. 이제 AI 시대의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계에게 수없이 많은 답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 등장하더라도 마지막 질문 하나만큼은 기계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을 인간 자신이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아무리 강력한 AI를 만들고 아무리 먼 우주에 도달하더라도 이타카를 잃어버린 오디세우스가 된다.

3000년 전 호메로스가 시작한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놀란은 그 오래된 질문을 오늘의 스크린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은 호메로스도, 크리스토퍼 놀란도, AI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항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수많은 폭풍과 유혹을 지나 긴 항해를 마친 어느 날, 우리는 끝내 어떤 인간으로 돌아올 것인가.


7. 사랑하는 아내와 서쪽으로, 마지막 항해에 나서는 오디세우스

놀란은 호메로스가 이야기를 끝낸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텔레마코스는 이타카의 새로운 왕이 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이타카를 떠나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이번 항해는 트로이를 향했던 전쟁의 항해도 아니고, 빼앗긴 왕좌를 되찾기 위한 귀향도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과 함께 싸우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기리고 자신이 지나온 전쟁과 죽음, 죄책감과 책임을 짊어진 채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향한다.

우리는 그 서쪽 바다를 인간의 마지막 이타카로 읽고 싶다.

해가 지는 곳. 하루가 저물고 인생이 저물며, 인간이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을 뒤로하고 더 먼 곳으로 건너가는 바다다.

태어나 세상으로 나왔던 인간이 사랑하고 싸우고 성공하고 실패하며, 수많은 욕망과 고통과 인연을 지나 마침내 자신이 왔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왕좌도 내려놓는다. 권력도 내려놓는다. 전쟁의 영웅이라는 이름도 내려놓는다. 마지막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는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다.

20년 가까운 기다림과 전쟁과 항해를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이제 함께 저물어가는 서쪽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돌아가야 할 이타카가 있고, 언젠가는 삶 자체를 넘어 돌아가야 할 더 큰 이타카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불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마지막 진언을 떠올린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산스크리트어 원음과 그 의미를 한 문장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칼럼의 언어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항해와 겹쳐 문학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읽고 싶다.

가자. 가자. 저 너머로 가자.
저 너머의 저 너머까지 함께 건너가자.
마침내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그리고 조금 더 오디세우스의 언어로 풀면 이렇다.

가자. 다시 가자.
이 삶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로 가자.
모든 욕망과 두려움과 집착을 넘어,
마침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자.

3000년 전 한 인간이 트로이에서 이타카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바다에서 수많은 것을 잃었다. 동료를 잃고 젊음을 잃었으며, 자신의 오만과 욕망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끝끝내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떠난다. 이번에는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 먼 곳으로 가기 위해서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오디세이인지도 모른다.

태어나 세상으로 나오고, 세상을 배우고, 사랑하고, 싸우고, 일하고, 꿈꾸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자식을 낳고,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준 뒤 마지막에는 자신이 왔던 곳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나는 것.

그렇다면 죽음조차 완전한 끝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에게 트로이에서 이타카로의 항해가 귀향이었다면, 서쪽 바다를 향한 마지막 항해 역시 더 큰 의미의 귀향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들에게 길을 물었다.
놀란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죄책감, 사랑과 책임을 안고 스스로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남길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인류는 이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능의 도구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기술을 만들어도 이 질문에 대한 답까지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

인간의 마지막 항로는 인간 자신이 정해야 한다.
진리를 향해. 정의를 향해. 자유를 향해.

인간을 사랑하고, 문화를 존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향해.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더 큰 이타카를 향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다시 가자. 이 삶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로 가자.오디세우스의 항해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더 큰 귀향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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