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히어로 1. 완다 막시모프
우연히 시작한 ‘완다비전’ 시리즈 첫 장면은 4:3 화면비의 흑백영상이었다. 미국 TV에서 방영됐던 옛날 시트콤 형식을 따른 듯 전형적인 구성이었다.스튜디오를 미국 예전 중산층 가정집으로 꾸며놓고 젊은 신혼부부가 된 완다와 비전의 알콩달콩 일상이 펼쳐졌다. 그 당시 시트콤 녹화가 그러했듯이 스튜디오 안 객석에 앉은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완다와 비전은 그 안에서 매우 행복하게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삶을 영위하고 있다. 비전은 이미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소멸됐는데도 말이다.
완다, 또는 스칼렛 위치의 단독 스토리라 하여 보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그 흑백의 시트콤인 채로 3부까지나 이어진다. 내가 알던 초강력 능력자인 그 ‘위치’가 맞나. 어리둥절한 채로 이 시리즈를 시작해 어느덧 끝부분에 이르면 그 흑백의 시트콤이 얼마나 슬픈 희망이었던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 흑백의 시트콤은 완다가 웨스트뷰라는 마을에 만들어낸 현실 조작, 즉 가상의 세계다. 상당수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고 물리적 상황을 조작해 얻어낸 완벽한 세상이다. 완다의 완벽한 세상은 사랑하는 비전과 쌍둥이 아들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삶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람들의 의식을 강제로 붙들어 놓아야 가능했던 일이므로 영원할 수는 없다. 결국 과거 미국 텔레비전의 시트콤 같았던 완벽한 가정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최상위 능력치를 갖고 있던 스칼렛 위치를 치명적으로 괴롭혔던 상대는 수많은 영화나 시리즈를 통해 거쳐간 빌런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 그가 사랑했던 이, 그가 원하는 상태가 모조리 파괴되고 사라졌던 '기억'들이다.
소코비아 출신이었던 완다(스칼렛 위치)는 어렸을 때 가족과 저녁을 먹는 도중 폭격을 맞아 부모님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폭격에서 함께 간신히 살아남은 오빠 피에트로(퀵 실버)와 쉴드에 의해 감금당한 채 생체 실험을 당했다. 훗날 어벤져스에서 활동하던 중 유일한 혈육인 오빠 피에트로가 전사했고, 타노스와 싸울 때는 사랑하는 비전을 소멸시켜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부재했고 국가기관에 의해 실험체로서 취급받아야 했던 과거 때문인지, 스스로도 유독 감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완다는 유독 그 수많은 히어로들 중에서도 아이처럼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다.
타노스를 비롯한 수많은 빌런들과 싸우며 겪는 위기보다 더 큰 위기는 완다가 그 모든 굴곡을 겪고 결국 스스로 빌런으로 분하게 될 때 온다.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우주의 질서를 뒤엉키게 만들었다.
소서러(마범사)들이 모여 수련하는 카마르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다른 멀티버스 지구-838의 히어로 집단, 일루미나티 멤버들(프로페서 X, 캡틴 카터, 캡틴 마블, 미스터 판타스틱 등)을 말 그대로 학살한다.
젊은 히어로 2. 진 그레이
진 그레이 역시 ‘엑스맨’ 세계관의 최강 뮤턴트 중 한명이다. 그는 피닉스의 화신이면서도 뮤턴트의 시초인 아포칼립스를 능가한다고 전해진다. 본디 너무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던지라 프로페서 X(찰스 자비에)에 의해 피닉스의 인격은 봉인되고 기억을 잃은 채 살아야 했다.진 그레이는 그 능력이 전 인류를 말살시킬 수도 있는 급이라 본인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 빌런이다. 오래 봉인된 피닉스의 인격은 억눌렸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발현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원자화시킨다. 심지어 자신을 보살펴준 프로페서 X마저 가루로 만들었다.
자신을 억지로 봉인해버린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피닉스와, 자신을 보살펴준 프로페서 X를 비롯해 가족 같은 뮤턴트들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진 그레이는 본인의 존재 자체가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의 감정이 분노나 슬픔으로 휩싸일 때마다 무시무시한 힘이 뿜어져 나와 파괴가 이뤄진다.
존재가 사라져야 멸망을 막을 수 있게 되는 진 그레이의 아이러니는 그를 사랑하는 주변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감정으로 늘 자아가 흔들린다. 혼란스러운 진 그레이의 자아는 결국 엑스맨 시리즈를 일단락 짓게 만든 빌런인지, 영웅인지 모를 아리까리한 존재로 남았다.
젊은 히어로 3.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에서 피터 파커는 모두에게 존재가 잊혀진 채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 복무한다. 덕분에 범죄율을 드라마틱하게 떨어뜨린 뉴욕의 영웅으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그러나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 어떤 빌런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겹게 홀로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스파이더맨은 ‘우리의 친절한 이웃’으로서 나쁜 놈을 정확히 선별하고 제압해서 경찰에 넘기는 일을 한다. 그 와중에 선량한 시민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또 없게 해야 한다.
타락과 각성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유전자 변이 조절장치까지 만들어 부착할 정도로 스파이더맨은 유독 시민사회 안에서 도덕·윤리의 잣대가 엄격하다. 빌런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피치 못할 실수조차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늘상 평가받고 욕을 먹고 칭찬도 받는다.
젊은 히어로들에게 드디어 평안이 찾아왔나요?
완다는 빌런이 됐지만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우주의 평행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다크홀드를 영구적으로 닫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일단 히어로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진 그레이 역시 자신의 능력을 봉인하고 기억을 조작했던 찰스(프로페서 X)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서야 모든 파괴를 멈추고 동료들을 보호한 후 ‘슈퍼 피닉스’로 재탄생하여 마찬가지로 히어로의 무대에서 퇴장했다.최상위 능력자 둘이 각자의 세계관에서 존재하는 동안 내내 그 지독했던 악당들을 만나면서도 불안정한 내면과 더 큰 싸움을 해내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야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한 스푼의 성숙함을 가지면서 동시에 히어로서의 삶에 일단락을 맺었다.
완다와 진 그레이의 긴 서사를 알고 있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애처롭고 기특한 결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픈 손가락이다. 좀 더 행복해질 순 없었을까 늘 신경이 쓰인다.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 파커는 어떤 결말을 맞았나. '브랜드 뉴 데이'는 무대에서 일단 후퇴했던 진 그레이를 다시 소환시켰다. 이제 새파랗게 어린 진 그레이가 본인의 능력치가 어디까지인지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에서 진 그레이 역시 자신의 능력만을 탐하는 어른들에 대한 배신감과 갑자기 사라져버린 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분노’와 ‘슬픔’의 게이지를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브랜드 뉴 데이’에서는 피터 파커의 위로로 일단 분노와 슬픔은 잠재웠지만 언제고 또 그것은 깨어날 것이다.
어린 진 그레이를 진정하게 만든 피터 파커는 그러니까 ‘브랜드 뉴 데이’에서 앞선 완다와 진 그레이보다 훨씬 진일보한 자아의 성숙을 어느 정도 이뤄냈다.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구현하면서도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지켜야 하는, 히어로로서 가장 어려운 과제를 20대 초반의 피터 파커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브랜드 뉴 데이’가 전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의 능력과 사회적 올바름을 지혜롭게 조절하고 있는 기특한 한 청년을 사람들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의 그 절제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른다. 그는 아직 젊기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풍파가 피터 파커를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알 수 없는 이 시점에,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모여 MCU의 세계가 다시 마블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될 그 날이 오고 있는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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