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혁 칼럼니스트]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서부전선 최전방 경계와 서울 방어를 책임지는 육군 1군단의 최전방 감시 초소(GP)와 일반 전초(GOP)에서 실탄을 장전하지 않은 중기관총으로 경계를 선다니 말이다.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GP와 GOP는 북한군과의 유사 시 초를 다투며 응전해야 하는 곳인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중기관총뿐만 아니라 유탄발사기, 심지어 K2소총 같은 개인화기에도 실탄을 장전하지 않았고, 군 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이 언론에서 '빈 총 경계'의 실상을 지적하기 전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만큼 군의 지휘 및 보고 체계가 먹통이었다는 후속 보도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공갈(恐喝)'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어떤 사물이 알짜가 빠졌을 때 우리는 이 공갈이란 접두어를 붙여 비하한다. 예를 들어, 속이 텅 비고 겉만 부풀게 구운 중국식 빵을 낮잡아 '공갈빵'이라고 부른다. 비록 속이 비었을지라도 공갈빵은 엄연한 빵이다. 총알 없는 총은 '공갈총'이다. 허나 공갈총을 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저 쇠붙이에 불과하다. 총이 아닌 쇠붙이로 코앞에 적군이 있는 최전방을 지키라는 건 군인의 본분을 다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빈 총 경계의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미군이 띄운 무인기를 우리 군이 격추할 뻔한 황당한 사태가 발생해 또다시 국민을 놀라고 화나게 했다. 지난달 30일, 경기 파주 최전방에서 1군단 예하 부대가 한·미 연합훈련을 하던 미군의 정찰용 무인기를 '미확인 비행체'로 오인했다는 거다. 한·미 군 당국 간, 그리고 우리 군 내부의 의사소통과 협조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요즘 군이 왜 이러나.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무시로 벌어진다. 이래서야 어디 국민들이 안심하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1군단장은 대체 왜 부하장병들에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지침을 내렸을까?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대통령의 의중에 코드를 맞추고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보신주의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군인이 정치를 의식하고 보신을 생각하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 결국 직무배제된 한기성 1군단장은 비육사 출신 첫 1군단장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육사 출신이 아니라는 것 외에 대체 그의 무엇을 보고 인사를 한 건지 궁금하다.
안보에 대한 불안은 자연스레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육·해·공 3군 사관학교 통합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한때 그러했듯 이재명 정부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의욕적이다. 명분은 자주국방. 주권 국가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거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걸 누가 반대할까. 그러나 자주국방은 자존심을 내세워서 될 일이 아니다. 하고 싶어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과연 우리 군은 자주국방의 능력을 갖추었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당장 전작권을 전환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과연 그런가? '시기'에 방점을 두는 우리 정부와 달리 미국이 강조하는 전작권 전환의 '조건'은 충족되었는가? 실력이 있는 자는 큰소리치지 않고 큰소리치는 자는 대개 실력이 없다. 보수정권이라고 자존심이 없어서 전환을 서두르지 않은 게 아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작권이 전환되면 대북 억제력 약화는 불가피하다. 의욕만 앞서도 안 되고 감정에 휘둘려서도 안된다. 정치적 셈법이 작동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렇지 않다고 대통령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육·해·공 3군 사관학교 통합도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통합의 명분은 '합동성' 강화와 융합형 인재 양성. 허나 기계적인 통합은 합동성 강화 이전에 각 군의 '전문성'을 해쳐 우리 군을 죽도 밥도 아닌 군대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전문성 없는 합동성은 사상누각이다. 융합형 인재의 바탕도 전문성이다. 그렇다면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
이 궁금증을 대통령이 직접 속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지난 4일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육사 출신이 또 쿠데타 할지 몰라 사관학교를 통합하려 한다는 의중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육사 벌주기, 육군 힘빼기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은 억측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육사가 아니라 서울대 법대를 없애야 한다. 태국의 사례에서 보듯 사관학교 통합이 쿠데타 가능성 축소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사법개혁, 검찰개혁 등 현 집권세력이 추진한 개혁들이 모두 이런 식이다. 무늬만 개혁일 뿐 속내는 복수혈전이다. 야권은 물론 전직 육·해·공 참모총장들도 들고 일어났다. 대통령의 가벼운 입이 통합 반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대통령은 전형적인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군 전체적으로는 매우 훌륭하다고 치하했다.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법인데 말이다. 스스로 군의 힘을 빼고 여러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와 달리 북한은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방침에 따라 2024년 봄부터 '휴전선 국경화' 작업에 들어가 DMZ를 요새화했다. 이란전쟁의 여파로 우리의 대북 방공 전력은 약화된 반면,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대가로 첨단 드론 전술을 익혔고 미사일 성능과 운용 능력도 고도화했다. 이런 북한군도 우리 군과의 우발적 충돌을 염려해 빈 총으로 경계를 설까?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중국을 대표하는 병법서 7종을 묶어 부르는 말로 손자병법, 오자병법, 사마법, 육도, 울요자, 삼략, 이위공문대를 아우른다. 《사마법》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장 사마양저의 병법을 정리·편찬한 것으로 '인본(人本)편'에 수록된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는 천하가 아무리 평안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짐을 일깨우는 천고의 명언이다.
사람들은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져 적의 위협을 과소평가한다. 군사력을 비용으로 여기고 경계 태세마저 흐트러진다. 안보 불감증이다. 사마양저는 바로 그런 심리를 경계했다. 평화는 희망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니 평화를 원할수록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유비무환의 정신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로마 격언이나 류성룡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임진왜란 반성문 《징비록》의 메시지도 다를 바 없다. 이를 군비 증강의 논리라고 곡해하거나 전쟁을 준비하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라고 비아냥대는 건 대단히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이다. 낙관은 방심을 부르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4주 연속 하락해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리얼미터, 8/3~8/7 조사). 주가 폭락, 부동산 급등과 세제개편, 형사소송법 개정 논란 등이 발목을 잡았다. 민심과 동떨어져 보이는 군 관련 정책과 쿠데타 발언도 지지율 하락에 일조했을 것이다. 최근 국민의 우려를 자아낸 빈 총 경계와 미군 무인기 오인 등 일련의 사태는 평화라는 환상에 취해 군 본연의 임무인 전쟁 대비를 잊은 '망전(忘戰)'의 풍조가 최전방 부대의 혈관까지 침투했음을 알리는 위험 신호다.
경제가 무너지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안보가 무너지면 그걸로 끝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평화를 빙자한 일방적 양보는 굴종일 뿐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는 남북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북송은 오랑캐라고 멸시한 거란에 돈으로 평화를 구걸하다 패망하고 중국 역사의 오욕으로 남았다. 평화를 지키는 힘은 상대방의 선의에 기댄 낙관이 아니라 물샐 틈 없는 경계와 준비에서 나온다. '천하수안 망전필위'는 군사 병법 이전에 위정자가 늘 가슴에 새겨야 할 냉철한 안보철학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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