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세계 유산, 등재보다 중요한 것

임병식 논설위원
[임병식 순천향대 초빙교수]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지난달 26일. 부산 벡스코 본회의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세계유산위원회 의장이 신규 등재를 선언하는 순간, 정적은 환호로 바뀌었다. 서로를 끌어안았고, 어떤 이는 눈물을 훔쳤다. 처음으로 세계유산을 품게 된 상투메 프린시페와 코모로, 남수단 대표단은 감격으로 들떴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2006년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지 20년 만에 첫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상투메 프린시페 대표단은 “특별한 회의에서 첫 세계유산을 등재했습니다. 부산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갖고 갑니다”라며 감격했다.

회의장을 나오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세계는 세계유산에 이토록 열광할까.

세계유산은 단지 오래된 건축물이나 아름다운 경관을 등재하는 게 아니다. 인류가 함께 공유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닌 유적과 자연을 세계유산에 올린다. 세계유산은 특정 국가에 속해 있지만 인류가 공동으로 물려받은 유산이다. 국제사회는 세계유산 등재라는 국제적 합의를 통해 유산 너머를 본다. 세계유산은 국가 브랜드를 만들고, 국가 정체성을 대표하며, 지역경제를 살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전략 자산이다. 문화유산을 둘러싼 경쟁은 이제 문화 경쟁을 넘어 국가 경쟁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등재는 세계유산의 가치를 인증해 줄 뿐, 그 가치를 키워 주지는 않는다. 진짜 경쟁은 그다음부터다. 세계유산을 어떻게 보존·관리하고, 어떻게 활용하며, 어떻게 국민의 자산으로 만들 것인가가 국가의 역량을 결정한다.

프랑스 보르도는 세계유산을 도시 브랜드로 만들었다. 역사와 와인, 건축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세계인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일본 교토는 천년 고도를 박제된 박물관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전통과 일상이 공존하는 도시를 만들고 체험을 통해 세계인을 끌어들였다. 페루 쿠스코는 잉카 문명의 영광을 관광과 교육, 문화산업으로 연결해 국가 정체성으로 확장했다.

이들 도시가 지닌 경쟁력은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유산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만든 핵심은 관리와 활용, 그리고 상상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돌이나 유적이 아니다. 그 돌과 유적에 담긴 시간이고, 그 안에 축적된 기억이다. 문화유산은 보존을 넘어 사람들과 호흡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대한민국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세계유산 강국이다. 종묘와 고인돌 유적, 반구천 암각화, 수원 화성, 갯벌,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해인사 장경판전 등 문화유산 15개와 자연유산 2개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세계유산은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등재 소식에는 열광하면서도 등재 이후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유산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는 무심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올림픽 메달 순위로 여긴다면 착각이다.

제48차 부산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남겼다. 이제는 물음을 바꿔야 한다. ‘몇 건 등재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가치를 만들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세계유산은 관광객 숫자를 늘리는 수단이나 지역 자랑거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육과 산업, 콘텐츠와 외교를 연결하고 지역의 미래를 바꾸는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등재 건수 중심의 정책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 방문객 수와 경제효과만 계산할 게 아니라 보존 상태와 주민 만족도, 청년 일자리, 교육적 활용, 지역 공동체 참여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오버투어리즘 때문에 주민의 일상이 무너지고 유산이 훼손된다면 성공적인 활용이라고 할 수 없다. 세계유산 가치를 지키면서도 지역 주민의 삶이 향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은 유산을 지키고 이야기를 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세계유산마다 고유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디지털 복원과 가상현실,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접근하기 어려운 유산을 세계 어디에서나 체험하게 할 수 있다. 학교 교육과 연계한 세계유산 교실, 주민 해설사와 청년 창작자가 참여하는 콘텐츠 제작, 유산을 잇는 체류형 관광도 확대해야 한다. 흩어진 유산을 하나의 서사와 동선으로 연결할 때 세계유산은 ‘보고 떠나는 장소’에서 ‘머물며 이해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이것이 등재 이후 진짜 경쟁이다.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새롭게 출범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 국가유산청 출범은 문화재 지정과 보호라는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보존과 활용, 향유를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자연유산과 무형유산, 문화경관까지 아우르는 국가유산 체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제는 행정조직 변화에 그치지 않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국가유산을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전략으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도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은 기억이다. 기술은 복제할 수 있지만 시간의 기억은 복제할 수 없다. 건물의 형태는 재현할 수 있지만 천년의 역사와 공동체가 공유한 시간은 흉내 낼 수 없다. 그래서 문화유산은 AI 시대에도 가장 인간적인 경쟁력이다.

지난 20세기 국가의 힘은 철강과 자동차, 반도체로 상징됐다. 21세기에는 문화유산과 스토리텔링, 그리고 정체성이 국가의 브랜드를 결정한다. 문화는 소비되지만 문화유산은 세대를 건너 국가 브랜드를 만들고 경쟁력이 된다. 보존은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등재는 영광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이다.

부산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세계유산을 얼마나 많이 보유했는가가 아니라, 그 유산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문화유산은 박제된 과거 유물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유산 숫자를 자랑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유산을 가장 창의적으로 보존하고 가치 있게 활용하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유산청의 역할과 기능에 걸맞게 예산과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 국가유산청이 제 역할을 다할 때 K-헤리티지는 K-팝과 K-콘텐츠를 잇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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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내외가 허민 국가유산청장, 칼레드 엘에나니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사진, 국가유산처 제공]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감사원 정책자문위원 
국가유산위원 ▷국가유산청 정책자문위원 ▷순천향대 초빙교수 ▷전 국회의장 정무비서관 ▷전 국회 부대변인 ▷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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