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물론 뉴욕 증시가 하루의 등락을 삼성전자 한 종목 때문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금리, 달러, 고용지표와 같은 거시 변수는 여전히 세계 금융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이날 시장이 보여준 장면은 AI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AI 공급망에 관한 중요한 신호는 뉴욕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서울과 타이베이에서 형성된 가격이 뉴욕 AI 기업들의 가치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다. 세계 자본시장의 작동 원리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증시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움직였다. 뉴욕이 하루의 방향을 결정하면 도쿄가 반응하고, 서울과 홍콩이 그 흐름을 이어받았으며, 유럽이 마지막 바통을 넘겨받았다. 세계의 자금은 시간대를 따라 이동했고, 월스트리트는 언제나 그 출발점이었다. 한국 투자자들은 밤사이 뉴욕시장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아침 투자전략을 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AI 혁명은 이러한 익숙한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AI 산업은 자동차나 스마트폰 산업과 다르다. 하나의 완성품 기업이 시장을 이끄는 구조가 아니라 GPU, HBM, 첨단 패키징, 파운드리, 데이터센터, 전력, 네트워크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움직인다. 어느 한 곳에서 이상 신호가 발생하면 그 충격은 즉시 전체 가치사슬로 확산된다.
AI Street는 특정한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울, 타이베이, 실리콘밸리, 뉴욕을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금융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월스트리트가 세계의 자본이 모이는 상징이었다면, AI Street는 AI 공급망의 가치가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되고, 그 가격이 다시 세계 자본의 방향을 결정하는 새로운 금융 공간이다.
20세기에는 자본이 기술을 평가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투자자들이 그 가치를 판단했고, 그 결과가 주가에 반영됐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그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기술 공급망의 변화가 자본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GPU 공급이 흔들리면 뉴욕이 흔들리고, HBM 공급 전망이 바뀌면 세계 AI 기업들의 가치평가가 동시에 수정된다. 자본이 기술을 평가하던 시대에서 기술 공급망이 자본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 속에서 서울의 위치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서울 증시는 세계 금융의 '수용자'였다. 뉴욕에서 결정된 흐름을 받아들이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의 서울은 점차 AI 공급망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하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이는 서울이 뉴욕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AI 투자자들이 뉴욕을 보기 전에 서울을 먼저 주목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한국 경제에 역사적인 기회다. 제조강국으로 축적해 온 반도체 경쟁력이 금융시장의 위상까지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자본의 흐름을 움직이는 시대, 서울은 더 이상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도시가 아니라 세계 AI 산업의 체온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선행시장'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갖게 됐다.
그러나 기회가 커질수록 위험도 함께 커진다. 세계 자본의 시선이 서울을 향한다는 것은 세계 자금의 변동성이 가장 먼저 서울을 통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AI Street는 축복인 동시에 새로운 시험대다.
서울이 AI Street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은 분명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많은 자금이 몰리는 시장은 언제나 가장 큰 변동성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기회와 위험은 언제나 같은 문을 통해 들어온다.
AI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다. AI 산업의 성장 속도가 빨라질수록 세계 자금은 AI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더욱 집중될 것이다. 한국은 HBM과 첨단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이 확대될수록 서울 증시는 글로벌 AI 자금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시장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본은 언제나 냉정하다.
기술이 좋다고 해서 자금이 영원히 머무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기대가 꺾이거나 공급망에 균열이 생긴다고 판단하는 순간, 국제 자금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필자는 이를 '플래시 캐피털(Flash Capital)'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과거 외국인 자금도 빠르게 움직였지만 AI 시대의 자금 이동은 훨씬 더 즉각적이다.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초고속 거래, 글로벌 ETF, 패시브 펀드가 결합하면서 시장의 평가가 바뀌는 순간 수십조 원 규모의 자금이 단기간에 이동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AI Street는 세계 자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먼저 떠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서울과 타이베이는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함께 갖고 있다. 두 시장 모두 AI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라는 점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금융시장 규모는 여전히 미국에 비해 작다. 시장이 작다는 것은 상승기에는 높은 탄력을 의미하지만, 충격이 발생했을 때는 변동성이 더욱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AI Street는 월스트리트와 다른 숙명을 안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세계 자본이 모이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크다. 반면 서울과 타이베이는 AI 공급망의 중심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완충할 금융의 깊이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한국의 기술 경쟁력은 높아질 수 있지만 동시에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함께 키우지 못한다면 기술의 성공이 오히려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반도체 산업만이 아니다. AI 시대에는 제조 경쟁력과 금융 경쟁력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 자금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금융 인프라, AI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할 벤처캐피털과 장기 투자자, AI 산업을 이해하는 자본시장, 그리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제도가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서울은 진정한 AI 금융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한국은 AI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AI 시대의 자본이 가장 신뢰하는 시장이 될 것인가. 전자는 제조의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후자는 국가 시스템의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다.
AI 시대의 승자는 뛰어난 기업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뛰어난 기업을 세계 자본과 연결하는 금융시장, 혁신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연구개발 생태계,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거버넌스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국가 전체가 경쟁력을 갖는다. AI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혁신 생태계의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AI를 기술혁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AI는 금융혁명이기도 하다. 기술의 중심이 바뀌면 자본의 흐름도 바뀌고, 자본의 흐름이 바뀌면 세계 금융의 지도 역시 다시 그려진다. 20세기 세계 금융은 월스트리트가 시간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AI 시대의 금융은 공급망이 시간을 앞서기 시작했다. 서울과 타이베이는 더 이상 뉴욕의 결과를 확인하는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AI 공급망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하고, 그 신호가 다시 뉴욕의 투자심리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이 AI Street의 본질이다. AI Street는 단순한 주식시장의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AI가 세계 자본시장의 질서를 어떻게 다시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서울은 지금 역사적인 갈림길에 서 있다. AI Street는 세계 자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길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할지는 반도체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금융의 신뢰, 시장의 깊이, 제도의 안정성, 그리고 국가 전략이 함께 만들어 갈 미래다.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량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세계 자본이 어느 나라의 기술을 가장 먼저 믿고, 어느 시장에서 미래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가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월스트리트가 지난 한 세기의 금융을 상징했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AI Street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좌표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한가운데에 지금 서울이 서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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