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수직과 수평을 이루어야 건물도 사회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전통적인 우리 건축물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건축물의 계급이 보인다. 전통 건물의 각 이름에는 건물의 크기와 용도, 그리고 누가 머무느냐에 따라 철저한 등급이 매겨져 있다. 이를 흔히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순으로 부른다. 건물의 서열을 이렇게 나눈 것은, 단순히 "크기가 크면 전(殿)"이라는 식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성격'과 '주인의 신분'이 철저하게 결합한 결과다.
 
1등급인 전(殿)은 가장 높은 격식으로 왕과 왕비, 대비의 공식 활동 공간이다. 인간 세상이 아닌 신(神)의 세계에서도 이 '전'을 썼다. 절의 중심인 '대웅전(大雄殿)', 성균관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 저승의 염라대왕이 있는 '명부전(冥府殿)'이 그렇다. 즉 '전'은 인간 세계의 왕이나 신령스러운 존재에게만 허락된 절대적인 성역이었다. 2등급인 당(堂)은 전(殿)에 준하는 격식으로 왕의 일상 집무나 세자의 공간이었다. 3등급인 합(閤)과 각(閣)은 전이나 당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 또는 관청 건물에 해당한다. 4등급인 재(齋)와 헌(軒)은 주로 독서, 휴식, 일상생활을 하는 개인적인 공간이다. 5등급인 루(樓)와 정(亭)은 풍류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오픈형 누각을 말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 건축물의 당호가 그곳에 머무는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다. 감히 지엄한 윗분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으니 "당신이 머무는 거대한 건물의 저 아랫자리(下)를 통해서 말씀드립니다"라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폐하(陛下)는 황제가 오르는 '섬돌 아래'에서 뵙는다는 뜻이고, 전하(殿下)는 '전(殿)'에 머무는 왕이나 왕비에게 올리는 칭호이며, 저하(邸下)는 왕세자가 머무는 '저택(邸)' 아래라는 뜻으로 세자에게만 썼다. 합하(閤下)나 각하(閣下)는 '합(閤)'이나 '각(閣)'에 머무는 정1품 정승이나 판서, 혹은 고위 관료를 부르던 말이다. 이 가운데 각하는 광복 이후 권위주의 정권기를 거치며 대통령의 전유물처럼 굳어졌다가, 1990년대 이후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 속에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내가 부르는 호칭의 높낮이가 곧 상대방이 머무는 건물의 등급과 정확히 일치했던 셈이다.
 
요즘 아파트 이름 이야기

과거의 조상들이 기와집의 당호로 신분을 나누었던 문화가, 수백 년이 지난 2026년 현재에도 'OO캐슬', 'OO팰리스'라는 아파트 브랜드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언어와 건축은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과시욕을 담아내는 가장 좋은 그릇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사는 공간'으로 신분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듯하다. 현대의 건설사들도 이 '공간의 계급화'를 마케팅에 치밀하게 활용하고 있다. 캐슬(Castle·성)이나 팰리스(Palace·궁전)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차별화된 상류층의 성벽이다"라는 은밀한 우월감을 자극한다. 본질적으로는 "이곳에 사는 당신의 신분은 남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는 나라에서 "너는 신분이 낮으니 당(堂)까지만 지어라" 하고 규제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인 지금은 '분양가와 집값'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 곧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씁쓸하면서도 곱씹게 되는 지점이다.
 
수직과 수평의 의미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땅이나 방바닥은 평평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둥근 지구 위에 살고 있다. 수직(垂直, Vertical)이란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 즉 지구 중심(핵)을 향해 똑바로 떨어지는 선이다. 옛 목수들은 실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단 '다림줄'을 내려 이 수직을 찾았다. 추가 가리키는 끝이 바로 지구의 중심이다. 수평(水平, Horizontal)은 그 수직선과 직각(90도)을 이루는 방향이자, 지구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같은 점들을 연결한 선이다. 엄밀히 말하면 수평선은 평평한 직선이 아니라 지구의 곡률을 따라 미세하게 휜 '거대한 원의 일부분'인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목수들이 건물을 지을 때 가장 공을 들인 것도 바로 이 수평과 수직을 맞추는 일이었다. 기둥이 수직으로 서지 않으면 벽이 휘고, 기단과 들보가 수평을 이루지 않으면 건물이 비틀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조선 시대는 철저한 '수직적 사회'였다.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중력처럼, 왕(전하)을 정점으로 정승(각하)과 판서, 그리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전·당·합·각·재·헌·루·정이라는 당호의 격식은 바로 이 수직적 계급을 시각화한 수단이었다. 반면 현대 사회는 모든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한 '수평적 사회'를 지향한다. '지구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연결'이 수평이듯, 누구 하나 더 높거나 낮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연결되는 관계를 뜻한다.
 
아파트는 구조적으로 거대한 수직 건물이다. 높은 층으로 갈수록 탁 트인 전망을 갖게 되고 가격도 더 비싸진다. 즉 아파트는 수직적 위계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높은 성벽 같은 아파트 브랜드를 소유함으로써,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나도 저 상류층과 '수평'을 이루고 싶다"는 신분 상승의 갈망을 표출한다. 한국인들의 아파트 선호는 남들보다 아래에 있고 싶지 않은 마음, 곧 수직적 열세에 처하고 싶지 않은 현대인의 불안이 아파트라는 거대한 수직 콘크리트 덩어리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투표: 1인 1표라는 완벽한 수평의 순간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장 뼈아픈 단면을 드러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대기를 견디다 못해 생업으로, 일상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유권자들의 포기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명백한 참정권의 침해다. 국민투표가 위대한 이유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수직적 조건이 완전히 지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타워팰리스에 살든 단칸방에 살든, 박사 학위가 있든 글을 모르든, 자산이 수백억이든 빚만 가득하든, 투표소 안에서는 누구나 정확히 '반지름의 길이가 같은 수평선 위의 점'처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선언이 활자가 아닌 실체로 증명되는 유일한 순간이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수직의 공간(청와대, 도청, 구청, 시의회)'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순이 시작된다. 선출된 대리인들은 자신이 주권자에게서 권한을 잠시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조선 시대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쓰고 가마에 올라타던 옛 선조들의 습속처럼, 그것을 수직적 계급 구조 안에서의 '신분 상승'으로 여긴다.
 
이러한 수직적 권력 의식이 내면에 깔려 있기에, 선거철에만 고개를 숙일 뿐 막상 일상에서는 주권자를 지극히 가볍게 여기는 행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투표지 몇 장 부족했다고… 뭐, 어쩌라고…"라는 안일함 속에는 유권자의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수직적 오만이 숨어 있다.
 
우리는 아직도 수직적 제도와 습관에 익숙해서, 수평적 관계의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 같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수백년 동안 단 한번도 수평적인 사회를 스스로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서구의 민주주의라는 수평적 제도를 급격하게 이식받았다. 머리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제도는 배웠지만, 몸과 습관은 여전히 "누가 더 높고 낮은가"를 따지는 수직적 관계 맺기에 더 익숙하다. 아파트 이름에 '캐슬'과 '팰리스'를 붙이며 이웃과 나 사이에 선을 긋는 심리, 나보다 직급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을 하대해도 된다고 믿는 문화, 국민이 준 권력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인들의 태도. 이 모든 것이 결국 '제도는 수평인데 의식은 수직인 상태'에서 오는 괴리다.
 
할석(割石·斫石): 비틀어진 수직과 수평을 바로잡는 일

나는 건설 현장에서 매일 거친 먼지와 소음 속에 무거운 장비를 들고, 콘크리트의 비틀어진 뼈대를 깎아내며 수직과 수평을 잡으려는 할석공이다. 건물을 지을 때 기둥이나 벽이 거푸집의 밀림이나 콘크리트 타설 오류로 기준선에서 벗어나면, 건물은 보기에도 흉할 뿐 아니라 붕괴위험에 처한다. 인간 사회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 사태처럼 권력이 유권자 위에 군림하려 들며 수직의 선이 비틀어질 때, 사회라는 건물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대등해야 할 인간관계, 곧 수평이 갑질과 대접받으려는 습속으로 일그러질 때, 공동체의 안정과 아름다움은 무너지고 만다.
 
건물의 뼈대가 틀어지면 할석공이 투입되어 깎아내야 하듯,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위계의식과 비틀린 수평적 관계의식 역시 그냥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주권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부조리한 선거 절차를 바로잡으려는 2030 젊은이들의 연대야말로, 우리 사회의 수직과 수평을 맞추는 '할석' 작업이 아닐까.
 
우리가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문을 열고 백성(百姓)에서 시민(市民)으로 거듭난 지 이제 겨우 80년 남짓이다. 수천 년의 절대왕정과 식민 지배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수평적 제도를 운영해 온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른 나라들이 수백 년에 걸쳐 피 흘리며 다져온 그 무거운 제도의 틀을, 우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식받았다. 겉으로 보이는 건물의 외벽, 곧 외형적 민주주의는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르게 올렸지만, 그 내부의 콘크리트가 단단하게 굳고 내면화되는 시간, 곧 수평적 관계의식이 자리 잡는 데에는 절대적인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 할 때 가장 거대하게 부딪히는 벽은, 바로 과거의 습속에 갇힌 이들과의 마찰이다. 이들은 여전히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가"를 따지는 수직적 질서 속에서만 안도감을 느낀다. 나이, 직급, 재산, 혹은 선거로 얻은 한 줌의 권력으로 계급을 나누고 군림하려 든다.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주권자가 목소리를 내면 '감히 아랫사람이 대든다'며 권위의식이라는 옛 칼을 빼 든다. 선거 관리 부실이나 주권자를 가볍게 여기는 행정 역시, 제도는 최첨단 수평인데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여전히 '관청이 백성을 통치한다'는 수직적 관성에 머물러 있기에 빚어지는 마찰이다.
 
서구의 민주주의 역사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권위주의로의 퇴행, 피비린내 나는 마찰을 겪으며 다듬어졌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제도를 연구하며 각자의 분야에서 성실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먼저 겪은 붕괴와 부실시공의 역사를 우리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현재 마주하는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은 사회가 무너지는 징조가 아니라, 오히려 비틀어진 과거의 습속을 깎아내고 올바른 수직과 수평을 찾아가는 불가피한 '할석의 과정'일지 모른다. 정치인이 권력을 신분 상승으로 착각할 때 유권자가 엄중히 책임을 묻고, 일상에서 수직적 갑질을 마주할 때 수평적 존중을 당당히 요구하는 그 모든 실천이, 우리 사회의 뼈대를 곧게 펴는 할석작업이 되는 것이다.
 
8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는 노년일지 몰라도, 한 국가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깊이로 보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단단해지기 시작한 '청년의 시기'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습속과 거칠게 부딪치며 성장통을 겪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단단한 철학을 품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실천하는 시민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외형만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내부의 수직과 수평이 완벽하게 맞물린, 가장 원숙하고 아름다운 민주주의 국가를 향해 우리는 지금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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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깎아낸다고 하는 것은 상처를 내는 것이다. 뼈를 깎고 살을 떼어내는 것이다. 아프고 힘들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똑바로 선다/필자 그림] 
필자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왔다. 현재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곤지역 아동들의 교육·급식·장학 지원을 이끄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 건설현장에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 프로그램으로 펼치고 있다.
idoos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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