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개혁, 행안부 이관은 해법이 아니다

김정래 전국팀장 사진아주경제
김정래 전국팀장. [사진=아주경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단순 행정 착오를 넘어 선거관리 체계 전반의 신뢰 문제로 번지고 있다. 정치권이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개편 논의를 본격화하는 배경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는 여전히 ‘구조 변경’에 치우쳐 있다.

일각에서는 선관위를 행정안전부 산하로 편입하거나 투·개표 업무를 행정부로 이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일본과 독일 사례를 보면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제도는 역사적·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해온 결과물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제도적·정치적 맥락이 다르다.

일본의 선거 관리는 중앙선거관리회와 지방 선거관리위원회가 맡는다. 총무성은 제도 설계와 행정 지원을 담당할 뿐, 선거를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 다만 투표 사무 등 실무는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수행한다. 개표는 지역 단위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며, 정당 참관과 시민 감시가 제도화돼 절차적 투명성을 보완한다.

독일은 연방선거관리관(Bundeswahlleiter)이 선거를 총괄한다. 이 직위는 관행적으로 연방통계청장이 겸직한다. 행정부 인프라를 활용하지만 법적으로는 독립된 선거관리 기능이 작동한다. 실제 집행은 각 주와 지방 행정조직이 맡으며, 개표와 결과 확정은 단계별 검증 절차를 거친다. 분쟁은 사법 절차를 통해 판단되며, 결과에 대한 제도적 신뢰를 뒷받침한다.

결국 두 나라의 공통점은 ‘행정부가 선거를 직접 관리한다’는 형식적 구조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핵심은 행정조직을 활용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성과 절차적 신뢰를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설계에 있다. 이를 위해 독립적 감시 체계, 투명한 절차, 명확한 책임 구조가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이러한 복합적 장치가 선거 관리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높은 제도 신뢰다. 일본은 선거 분쟁에 대해서도 사법 판단과 행정 절차에 대한 수용도가 높고, 위법 행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강하게 작동한다. 독일 역시 연방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한 사법 통제와 정당·시민사회의 감시가 촘촘히 작동한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이 드문 배경이다.

반면 한국은 다르다. 최근 수년간 부정선거 의혹이 반복되며 선거 결과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행정부로 이관할 경우, 제도 개편은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논란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제도는 바꿀 수 있어도 신뢰는 옮길 수 없다.

더욱이 선거는 단순한 행정 서비스가 아니라 권력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절차다. 관리 주체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의 구조 변경은 결과에 대한 승복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제도의 설계보다 그 제도를 둘러싼 신뢰 환경이 먼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헌법이 선관위를 독립기관으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3·15 부정선거 이후 권력으로부터 선거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 회복의 핵심 과제로 인식됐다. 독립성은 조직 형태가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 축적된 제도적 안전장치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관이 아니라 신뢰 회복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개표 과정과 검증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대안은 존재한다. 선관위 인력 구조를 개선하고, 투표 사무를 담당하는 지방 공무원의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방안이다. 일본처럼 행정 인력을 활용하되, 독일처럼 사법적 통제와 외부 감시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운영 효율을 높일 수 있는 현실적 선택이다.

선거 제도의 핵심은 구조가 아니라 신뢰다. 신뢰 없는 개편은 개혁이 아니라 또 다른 불신의 시작일 수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