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으로 막았던 160엔, 한 달 만에 재접근… 깊어지는 엔화 불신

  • 장기금리 뛰어도 엔화 매수 제한적

  • 경상흑자 사상 최대에도 실제 엔 수요 미약

  • 당국 개입 경계도 엔캐리 거래 못 막아

지난달 30일 엔 환율을 나타내는 도쿄의 한 전광판사진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엔 환율을 나타내는 도쿄의 한 전광판[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일본 엔화가 다시 달러당 160엔에 다가서고 있다. 지난 4월 말 일본 당국의 시장 개입으로 추정되는 엔화 매수 이후 한때 155엔대까지 되돌아갔던 엔화가 약 한 달 만에 다시 159엔대 중반까지 밀렸다. 일본 당국이 가까스로 밀어낸 160엔 방어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28일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59.57~58엔에 거래됐다. 전날 오후 5시보다 0.22엔 상승(엔화 가치 하락)한 수준이다. 오전 한때는 159.60엔 부근까지 오르며 지난 4월 30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과 이란이 협상 중 재차 공격을 주고받았다는 보도로 원유 선물 가격이 오르면서 일본의 무역수지 악화 우려가 엔화를 계속 짓눌렀다는 게 닛케이의 설명이다.

그러나 엔화가 한 달 만에 다시 160엔에 다가선 흐름을 중동 변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같은 기간 일본에서는 장기금리가 뛰었고 경상흑자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당국의 시장 개입 경계도 살아 있었다. 셋 다 원래는 엔화를 끌어올릴 재료다. 그런데도 엔화는 약세로 밀렸다. 시장의 관심이 '엔저를 막아야 할 재료들이 왜 힘을 쓰지 못하느냐'로 옮겨간 이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장기금리와 엔화의 엇갈림이다. 통상 국채금리 상승은 해당 통화의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장기금리가 뛰어도 엔화 매수세가 강해지지 않고 있다. 닛케이는 지난 1년가량 미일 장기금리 차가 좁혀졌는데도 엔화 약세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일본의 장기금리 상승이 경기 회복이나 통화정책 정상화의 신호라기보다 재정 리스크와 일본은행이 물가 대응에 뒤처진다는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시장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닛케이는 짚었다.


같은 금리 상승이라도 시장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달라진다. "일본 경제가 정상화되고 있다"는 신호라면 엔화 매수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일본 국채를 보유하려면 더 높은 보상이 필요하다"는 신호라면 오히려 일본 자산에 대한 불안으로 읽힌다. 지금 시장에서는 후자에 가까운 해석이 힘을 얻고 있어, 일본 국채금리가 올라가도 해외 자금이 일본 국채와 엔화를 적극적으로 사들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엔화 약세를 더 설명하기 어렵게 만드는 숫자도 있다. 일본의 대외수지다. 미즈호은행의 가라카마 다이스케 수석 시장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분석에서 일본의 2025년도 경상수지 흑자가 34조 5218억엔으로 3년 연속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무역수지도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고 짚었다. 통계만 놓고 보면 엔화가 약해질 이유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외환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통계상 흑자가 아니라 실제 엔화 매수로 이어지는 돈의 흐름이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일본 국내로 들어와 엔화로 환전되지 않고, 현지에 재투자되거나 외화자산 형태로 남으면 경상수지 흑자로 잡혀도 엔화 수요를 키우지는 않는다. 가라카마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1~3월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가 9조 5452억 엔이었지만, 실제 엔화 매수로 연결되지 않는 해외 재투자 수익 등을 빼면 현금흐름 기준 흑자는 약 1조6000억 엔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향후 원유 가격이 다시 오를 경우다. 사상 최대 경상흑자에도 엔화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당에, 원유 가격이 오르면 그나마 대외수지를 떠받치던 무역수지 흑자도 흔들릴 수 있다. 가라카마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일본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배경에는 원유 가격 하락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고가 원유 수입 부담이 커지면 무역수지는 시간이 갈수록 다시 악화돼 엔화 매도 압력을 다시 키울 수 있다.
 

다시 환시 개입?


남은 안전판은 당국의 환시 개입 가능성이다. 160엔이 다시 가까워지면서 시장에서는 지난 4월처럼 일본 당국이 시장 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계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개입으로 엔화가 일시적으로 반등해도 엔저 압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엔화는 여전히 주요 통화 중 조달 비용이 낮다. 미국 등 해외 주요 증시가 오르면서 위험자산 투자심리도 살아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입으로 엔화가 일시적으로 강해져도, 엔화를 빌려 달러 등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 거래가 다시 작동하며 엔화 매도 압력이 되살아난다. 닛케이도 개입으로 엔화가 반등하면 엔캐리 등에 따른 장기적인 엔 매도가 곧바로 확산돼 엔화 하락 압력을 다시 키울 수 있다고 짚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6월에 금리를 올리더라도 이후 추가 인상 의지를 분명히 보이지 않으면 엔캐리 거래를 꺾기 어렵고, 엔화 강세 효과도 제한적일 것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결국 세 흐름은 한 곳으로 모인다. 장기금리 상승, 사상 최대 경상흑자, 당국의 시장 개입 가능성이 모두 엔화를 적극적으로 사야 할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금리에는 재정·물가 불안이, 경상흑자에는 실제 엔화 매수 수요 부족이, 개입에는 엔캐리 거래라는 한계가 따라붙는다.

엔저를 막으려면 금리 인상 의지를 보여줘야 하지만, 일본은행(BOJ)의 선택지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금리를 올리면 장기금리 상승과 국채시장 불안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닛케이에 따르면 일본의 10년물 국채금리는 이달 한때 2.8%로 29년 반 만의 높은 수준까지 올라 이미 불안정한 상태다.

일본은행은 다음 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추가 금리 인상 여부와 함께 국채 매입 축소 계획도 논의한다. 장기금리 급등을 막으려 국채 매입 축소 속도를 늦추면 국채시장은 안정될 수 있지만, 시중 유동성 회수가 지연돼 엔저 압력이 커질 수 있다. 엔저를 막는 카드와 국채시장을 안정시키는 카드가 서로 충돌하는 구조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은행의 다음 선택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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