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지속되는 엔저, 일본경제 정상화 '시험대'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나라에서도 원화 환율이 급등하여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것과 같이, 최근 일본 경제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는 지속되는 엔저 문제이다. 엔저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2010년대 초반 아베 정부가 추진한 아베노믹스 이후 장기적으로 누적되어 온 구조적 흐름이다. 지난 5년만을 대상으로 달러당 엔화 환율을 보면 2021년 평균 110엔 안팎에서 2022년 131엔, 2023년 136엔 수준으로 상승했고, 2024년에는 평균 151엔을 넘어섰다. 2025년에는 다소 안정되는 듯했으나 평균 150엔 전후에 머물렀고, 2026년 들어서도 157~162엔대의 약세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일본 경제가 경험했던 ‘안전자산’이라는 신화의 시대와는 사뭇 다른 국면이 전개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엔저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인가? 먼저 엔저의 직접적 원인은 미·일 금리 차이다. 미국은 코로나 이후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빠르게 금리를 인상한 데 반해 일본은행은 장기간의 디플레이션 기억과 취약한 내수 회복을 의식해 금융완화 정책에서 벗어나는 데 매우 신중하였다. 일본은행은 2024년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하고 2025년 이후 정책금리를 단계적으로 인상했지만, 시장은 여전히 일본의 금리 정상화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막대한 정부부채, 장기금리 상승에 대한 정치적 부담, 주택대출과 중소기업 금융비용에 대한 우려가 겹치면서 일본은행의 정책 여지는 취약하다.

그러나 엔저는 단순히 금리 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치 경제적 배경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에너지와 식량의 수입 의존도가 높고, 원유·LNG 가격 상승은 곧바로 무역수지와 가계 물가에 영향을 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고, 최근 중동 정세 불안까지 겹치면서 엔저는 수입 물가 상승을 증폭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물가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보조금과 감세를 동원해 왔지만, 이러한 재정 대응은 국채 시장에는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엔저는 통화정책, 재정정책, 에너지 안보, 임금 정책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이다.

엔저의 긍정적 효과도 분명히 있다. 첫째, 자동차·기계·전자부품 등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과 해외수익 환산 이익을 높인다. 둘째, 방일 관광객 증가와 인바운드 소비 확대에 유리하다. 실제로 엔화 약세는 일본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여행지로 만들었고, 지방경제와 서비스업 회복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셋째, 일본 내 생산거점 회귀와 외국인 투자 유치에도 일정한 유인을 제공한다. 엔저는 일본 제조업의 국내투자 확대, 공급망 재편, 반도체·배터리·첨단소재 분야 산업정책과 결합할 경우 성장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엔저는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는 단계에 들어섰다. 첫째, 수입물가 상승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잠식한다. 명목임금은 춘투를 통해 상승하고 있지만, 물가상승률을 충분히 앞지르지 못하면 실질임금은 개선되지 않는다.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임금-물가 선순환은 임금 상승이 소비회복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엔저로 인한 식료품·에너지 가격 상승이 계속되면 가계는 소비를 늘리기보다 방어적으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둘째, 엔저는 기업 간 격차를 확대한다. 대기업 수출기업은 환차익과 해외수익 증가의 혜택을 누리지만, 내수형 중소기업은 원재료·에너지 비용상승을 가격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한다. 셋째, 과도한 엔저는 일본 경제에 대한 신뢰 문제로 번질 수 있다. 환율은 단순한 가격 변수가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 체력과 정책 신뢰를 반영한다. 정부가 반복적으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서더라도, 통화·재정정책의 방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면 개입 효과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에 필요한 것은 특정한 환율 수준을 방어하는 정책이 아니라, 환율이 안정될 수 있도록 경제의 기초체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조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첫째, 일본은행은 금리 정상화를 지나치게 지연해서는 안 된다. 다만 급격한 인상은 가계부채, 기업투자, 국채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임금 상승률과 수입 물가를 포함한 물가상승률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점진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상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금리 인상 그 자체보다 정책 반응 함수의 불확실성이다.

둘째, 재정정책은 보편적 보조금보다 표적 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을 완화할 필요는 있지만, 광범위한 보조금은 재정 부담을 키우고 에너지 절약과 산업 구조 전환을 지연시킨다. 저소득층과 에너지 취약계층에 대한 한시적 지원은 유지하되, 재정 여력은 생산성 향상, 탈 탄소 투자, 전력망 확충, 첨단산업 인프라에 집중해야 한다. 엔저를 단순히 방어하는 데 돈을 쓰기보다, 엔화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데 재정을 써야 한다.

셋째, 외환시장 개입은 보조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투기적이고 급격한 환율 변동을 완화하기 위한 개입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엔저의 원인이 금리 차, 무역수지, 에너지 수입, 성장잠재력에 있다면 외환 보유액을 동원한 개입만으로 추세를 바꾸기는 어렵다. 개입은 시간을 벌어주는 정책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은 아니다.

넷째, 임금 상승을 생산성 향상과 연결해야 한다. 일본 경제의 과제는 단순히 임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까지 임금인상 여력을 갖도록 산업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디지털화, 자동화, 인력 재교육, 노동이동 촉진, 여성·고령층의 생산적 참여 확대가 병행되어야 한다. 실질임금이 회복되어야 내수가 살아나고, 내수가 살아나야 일본은행도 안정적으로 금리를 정상화할 수 있다.

엔저는 일본 경제에 주어진 위기이자 기회이다. 약한 엔화가 수출과 관광을 돕는다고 안주한다면, 일본은 수입물가 상승과 실질소득 감소라는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반대로 엔저를 계기로 통화정책 정상화, 재정지출 구조조정, 에너지 안보 강화, 생산성 제고를 동시에 추진한다면 일본 경제는 디플레이션 이후의 새로운 균형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더 이상 초저금리와 재정 확대에 의존하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엔저의 지속은 일본 경제가 아직 그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또한 앞으로 그 신뢰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는 시장의 신호이기도 하다. 원화의 약세로 고심이 깊어지는 한국 경제도 일본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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